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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용도

일상다반사 9

by 이파리

산책을 나가려는데 블루투스 연결이 안 된다. 팟캐스트가 내 산책 친구, 이러면 곤란하다. 아들을 불러 긴급 구조 요청을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자주 불러서 이일저일 부탁하는 바람에 아침나절을 다 보낸 아들이 잠시 쉬려다가 다시 소환된다.


공연히 미안하고 민망해서 “엄마가 너 없으면 못 살겠다~ 하루에 백 번은 부르는 것 같아.”하니, “저 있을 땐 괜찮은데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잘 보고 배워 두세요.”하며 연결 방법을 알려준다. 들여다는 보지만, ‘껐다가 다시 켠다’를 최고의 해결책으로 아는 나로서는 블루투스가 앞으로 힘을 더 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아들은 고등학교 때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서울 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되어 경기 서부인 집과는 너무 멀었다. 통학이 쉽지 않아 전역 후부터 자취를 하다가 최근 다시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공연히 월세 지출을 하는 것도 아까웠을 테고, 무엇보다도 몸이 많이 안 좋아진 것이 자취 생활을 마무리한 직접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180센티가 넘는 키에 한 덩치 하는 아들은 얼핏 보면 건장하고 힘센 청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릴 적부터 감기, 편도선염, 비염 등의 잔병치레가 잦은 편이었고, 도무지 강단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연약한(!)’ 체질의 소유자다. 입대할 때도 국가가 이렇게 취약한 인원을 뽑아가다니 병력의 손실이라며 우스개를 했을 정도이니. 여하간 아들의 잔뜩 무거워진 몸과 부실한 체력을 리셋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취업도 시급한데, 몸관리까지... 한숨이 차오르고 부아도 치민다. ‘남의 집 자식들은 어쩌고 저쩌고~’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아들도 풀이 죽었다.


그러나,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 웃을 일이 많아졌다. 자는 모습만 보아도 헤실헤실 미소가 비어져 나오고, 웃기는 영상을 보여주거나 어이없이 재밌는 말장난을 할 때마다 실소와 폭소가 번갈아 터져 나온다.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부가 멍멍이 두 마리와 조금은 심심하게 지내다가 젊은 사람이 들어오니 공기가 다르다. 둘이 지낼 때보다 빨래도 많아졌고, 건강한 식단을 마련해 주느라 분주해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의 기회비용은 약과다.

늘 그랬으면 좋으련만. 뼛속 깊이 K-엄마요, 전직 교사인 내가 좋은 말씀(aka 잔소리)을 입 밖에 내지 않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모든 좋은 말씀이 그러하듯, 나도 ‘아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지만, 잔소리의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아들은 교복을 줄여 본 적이 없을 만큼 규칙 어기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의 학생이었고 성정도 부드러운 편이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서 제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면 꾸짖거나 훈계할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나의 충고, 조언을 가장한 따져 물음, 다짐 강요가 이어지곤 했다.

어디 가서 남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은 있지만, 늦잠, 게으름, 꾸물거리기 등의 소소한 행동에 시선이 꽂히는 날이면, ‘저거 빨리 안 고치면 나중에 직장 생활은 어떻게 하나’라든가, ‘저럴 시간에 책을 한 장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싶은 걱정과 노여움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에미넴’을 아시는지? 미국의 유명한 래퍼, 맞다. 그런데 또 한 가지의 뜻이 있으니, 유추해 보시라. 나는 신들린 에미넴이 되어 즉흥 랩을 쏟아낸다. 심지어 라임도 맞는다.


게다가 아들도 어린 날과는 다르다. 대한민국 예비군 화력이 어디 가겠나. 제 생각에 이건 지나치다 싶으면 단호한 목소리로 내 기를 죽인다.(물론 기죽은 내색을 하지 않을 정도의 자존심은 있다.) 말을 하는 동안에는 내 말이 300%, 400% 지당하게만 여겨진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생각하는 여유를 아직 갖지 못했다.

조목조목 제 입장을 피력하는 아들에게 과거의 절대적 권위와 위엄을 되찾고 싶고, 내 앞에 고개 숙이는 꼴을 보고 싶은 호승심이 이성을 짓누른다. 하지만, 어른이 된 아들도 호락호락 항복문서를 읽어대지는 않는다. 엊그제도 한밤중에 아들 방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불빛에 안 자고 게임을 한다 싶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방언(!)을 쏟아내다가 외견상 무승부(실상은 내 패배)로 끝을 냈다.

이튿날 공연히 심술이 나서 말도 안 걸고 여느 날과 달리 멍멍이 산책도 혼자 나가는 것을 본 아들은 청소 말끔히 해 놓고 내 눈치를 본다. 안다. 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집안 분위기 냉랭한 게 싫고, 엄마나 아부지 마음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라는 걸. 엄마가 버리지 못하고 썩히는 것들도 썩썩 치워놓고, 제 방도 반짝반짝 치워놓고 아들은 독서실 행이다.

오늘 아침, 좁은 베란다에 빨래를 널려니 걸리적거리는 것이 많은 데다, 오래된 빨래걸이는 수평도 안 맞는다. 남편이 솜씨가 좋은 편이라 무엇이든 남편에게 맡기는 게 습관이지만, 요즘 아들이 치우고 고치는 모습을 보니 소근육 발달이 늦어 손놀림이 둔하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르던 터라 아들을 부른다. 엄마 목소리에서 이미 부탁할 것이 있는 것을 알아챈 아들은 뚝딱뚝딱 빨랫대를 조절하고, 너저분한 것들을 버리고, 더러운 것을 닦아낸다. 베란다가 말끔해졌다.

어제저녁 오랜만에 아귀찜을 먹는데 아들이 뒤적뒤적 새우를 골라냈다. '그렇게 뒤적이면 삭아서 물 생긴다, 여럿이 먹을 때 휘젓지 마라' 등등 내 딴에는 좋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남편이 한 마디 한다. “당신하고 나 먹게 새우 발라주려고 그러잖아.” 뜨끔하다. 여전히 아들을 어린 사람으로 보고 가르치려고만 하는구나.

물론 아들을 위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그러나 아들은 내 좁은 시야를 벗어나 스스로의 방식으로 세상을 만드는 중이다. 믿고 맡기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기댈 어깨가 필요할 때, 어깨를 빌려주는 것이 남아 있는 부모 노릇이다.

아들은, 부탁을 잘 들어주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맛난 것을 사다 주고, 내 유머 코드에 맞는 우스개를 찾아 웃게 해 준다. 걱정도 되지만 의지도 된다. 가끔 노래방에도 같이 가주고 영화도 보자고 해 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아들의 쓸모는 나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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