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남편은 좋아할 리 없지만, 산만 대마왕인 나는 저녁 식사 후 양치를 하면서도 그새를 못 참고 지루한 욕실을 떠나 거실로 나온다. 입에 거품을 보글보글 물고는. 십삼 층 아파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까마득하게 지상과 멀다. 하늘이 더 가까운 것만 같다. 하늘 한가운데 달이 떠 있다. 여인네 눈썹처럼 어여쁜 초승달도 아니고, 어디 서러운 울음소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법한 그믐달도 아닌 음력 열하루의 평범한 달이다.
그런데, 이를 닦다가 그 달과 눈이 맞았다! 분명.
지구에서 384,400킬로미터, 빛의 속도로는 1.2초, 내가 시속 5킬로미터로 쉬지 않고 걸어가면 8년 9개월이면 가 닿을 수 있는 곳에 달이 있다. 어쩐지 아주 가까운 곳만 같다. 이 광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서 태양만 바라보며 무한 등속 운동(이것은 비과학적 표현. 50억 년 후면 지구도 없어질 운명)을 하는 지구 옆을 지키는 좋은 동무다.
몽골에 갔을 때, 달이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둥실, 달 떠오르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보름이라 휘영청 달빛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땅을 채웠다. 별들이 달보다 훨씬 크고 빛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만, 심지어 달은 별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내 눈에 와닿는 달빛이 가장 찬란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구에 발붙인 인간이라 그럴 것이다. 달은, 밤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등공신, 인공의 조명이 아무리 밝아도 그 위
에서 자신의 영역을 고고히 지키는 아르테미스 여신이다.
그러나 달은 겸손하다. 낮에도 지구를 지켜보련마는 태양에게 왕좌를 양보하고 간혹 하얀 낮달로 여전히 곁에 있음을 알려준다. 달은 꼭 하나 있었으면 싶은 말수 적고 다정한 친구 같다.
경포대에 가면 달이 다섯이란다. 하늘에, 바다에, 호수에, 술잔에, 마지막으로 그대의 눈동자에 달이 떠서 그렇다나. 그런 류의 낭만은 사양하더라도, 밤바다에서 물결마다 부딪쳐 빛나는 달빛을 보면 월인천강지곡이라는 표현이 거짓이 아니구나 싶다. 달은 하나의 몸으로 지상의 모든 바다와 호수와 강과 우리 집 유리창에까지 찾아와 뜻하지 않은 기쁨을 안긴다.
달빛 밝은 밤길이라면 혼자 걸어도 좋을 것이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을 만난 대도 넉넉한 보름달빛 아래서라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면 엄마 아버지 무덤 사이에 누워 달을 올려다보며 하룻밤을 지내래도 괜찮을 것 같다. 달을 올려다보면서 내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사실은 허상이라는 것을, 두려움은 내 마음이 만든 그림자임을 깨달아서 그럴 것이다.
말이 많아 탈도 많은 인간 세계에서, 그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에 마음을 뺏기다가, 나 역시 터럭 한 올만큼의 고통에도 부들부들 떠는 존재임을 깨닫고 슬퍼지다가, 문득 눈이 마주친 달 덕분에 마음이 가볍다. 저 달과 나는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고, 달이 저토록 밝은데 나도 밝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