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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by 이파리

여름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때 차츰 시원해진다면 아직 여름이 덜 여문 시기, 고요히 있어도 열기가 피부 아래 차오르면 무더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선풍기를 꺼내고, 몸에 붙지 않는 여름옷들을 주섬주섬 챙긴다. 외출을 하지 않아도 하루 두어 번의 시원한 샤워는 기본이다.

과일전에 자두, 살구가 얼굴을 내민 것이 바로 얼마 전이고, 복숭아는 아직 아기 주먹만 한 데다가 단맛도 덜 들었는데, 기어이 이른 더위가 찾아오고 만 모양이다. 농산물들도 계절을 잃어버려서 한겨울 딸기 정도야 이제 당연히 여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우스를 벗어나 햇살 받고 자란 여름 과일은 순서가 있지 않았던가? 초여름이면 화안한 주황색 살구도 나오고, 노릇노릇 발그스레한 자두가 처음엔 야물고 단단하다가 늙은 엄마 젖가슴처럼 몰랑몰랑 단내를 풍길 때쯤 복숭아도 그린 듯한 자태로 나타나고, 노란 참외가 수북이 쌓이고, 수박도 하나둘 보이던 순서조차 엘니뇨가 몰고 온 열기에 녹아 없어졌나 보다.

여름과 더위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어쩐지 두 낱말은 각각 다른 느낌이다. 여름이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과 쨍쨍한 햇살과 그 햇볕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 그 아래 앉은 사람들 사이를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을 연상시킨다면, 더위는 끈적한 열기, 땀, 이마와 목덜미에 들러붙는 머리카락, 모기, 순식간에 쉬어버리는 나물과 한 나절 만에 부글부글 거품을 만들며 상해 가는 국 냄비 따위를 떠오르게 한다.

여름 한낮에 책 한 권 들고, 실개천에 발 담그면 그만한 쾌락도 없을 듯하고 ‘여름의 열정도 반할 만한 구석이 있지’ 싶다가, 더위와 습기를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여름이 다가오는 것이 무섭기만 하다. 조삼모사 격인지도 모를 생각들이다.

다들 볼일 보러 나가고 혼자 남은 빈 집에서 두 마리 늙어가는 강아지들과 함께 빈둥거리노라니, 얼핏 보면 여름 한담 그 자체라는 생각도 들지만, 눕거나 엎드렸던 방바닥이 어린애 오줌 눈 자리처럼 금세 뜨뜻해지는 바람에 더는 그 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진다. 여름이면 컨디션도 난조라 오래 밍그적거리면 머리부터 지끈거리고, 습기를 제멋대로 빨아들인 몸뚱이는 자칫 부어오르기 일쑤다. 두어 시간 뒹굴었더니 사지가 묵직하다. 움직이는 게 상수다. 장마가 다가온다니 양이 많지 않은 빨래지만 세탁기에 넣고, 분리수거 재활용품들을 정리한다. 여기저기 습기로 상할 만한 것들도 이참에 정리해야 한다.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 한반도에 태어난 것은 일종의 훈계일까. 일 년이 두 계절 정도면 변화도 있고 괜찮을 듯하건만, 사계절이라니! 어떤 사람들은 장마철도 하나의 계절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던데 그 말도 맞는 말이니, 이 나라 사람들이 철에 맞는 옷가지를 갖추고, 먹거리를 마련하고, 이부자리며 소품 일습을 준비하며 살려면 얼마나 많은 심력과 노동력과 돈이 드는지 모른다. 어쩌면 자주 바뀌는 자연환경 때문에-혹은 덕분에- 한국 사람들이 이토록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연중 한결같은 기후가 계속되는 지역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을 하고 있노라면 나보다 철든 남편이 딱하게 바라본다. “당신, 그런 데선 지루해서 못 산다고 했을걸?” 맞는 말씀이오. 지루한 건 또 딱 질색이지. 겨울엔 봄꽃과 나무 향기를 그리워하며 견디고, 여름엔 가을에 풍겨올 마른풀 냄새를 떠올리며 버티는 삶이다. 질색만 할 것이 아니라 여름에게도 마음을 좀 내어주어야 할까 보다.

반가운 손님처럼 여름을 대하고 싶은데... 에어컨 빵빵 틀어주는 도서관으로 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고, 동해가 바로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콘도에서 모래밭에 즐비한 파라솔과 젊은 인파와 한밤까지 떠들썩한 열정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 이른 아침에 뒷산에 올라 얼려 온 물 한 통과 과일 도시락을 까먹으며 그늘진 자리에 돗자리 펴고 앉아 나뭇가지 사이로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도 여름에 할 만한 일. 수박 주스가 맛있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도 다정한 여름 나기. 시원한 맥주는 마실 땐 좋지만, 몸에 남는 열기는 더 오래 괴로운 법.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겠지?

길어야 7, 8월 두 달이다. 땅과 하늘에서 솟아오르고 쏟아져 내리는 맹렬한 열기와 습기를 몸으로 견뎌 가며 삶을 꾸려가는 이들도 많고 많다. 겨드랑이나 등에 땀 좀 난다고, 머리카락이 들러붙는다고 호들갑을 떨며 에어컨을 켜는 대신,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여름 속으로 깊숙이 쑥 들어가 보고 싶다. 발을 적실까 봐 눈앞에 펼쳐진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고향에 주렁주렁 열린 청포도를 먹기 위해서 두 손이 함뿍 젖는 것은 괘념치 않던 육사처럼 내 시간 앞에서 서슴지 말아야겠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시간에, 이번 여름이 아름다운 장면으로 눈앞을 스쳐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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