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집, 꽃치레
꽃순이는 일주일쯤 호전되는 듯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잔병치레 없이 효도하던 꽃순이. 그러나 6킬로그램 남짓, 작은 그 몸 안에 깃든 생명력은 끝을 향해 갔다. 맥이 풀린 다리로 몸을 못 가누는 아이를 보며 그저 황망해하는 동안, 남편은 꽃순이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동나무 관을 주문했어.’
딸을 낳으면 혼수 준비로 오동나무를 심는다는 옛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우리 꽃순이에게 관이라니. 숨이 멎어가는 아이 앞에서도 ‘죽음’에 관련된 말을 하지 말라 생떼를 쓰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먼저 떠나는 존재를 잘 보내주어야 하는 것도 남은 이가 감당할 몫.
‘이거 사다 놨으니 더 오래 버틸 거야. 수의 만들면 노인들도 오래 사신다잖아.’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헛된 믿음이라는 걸 알지만, 남편과 나는 무엇에든 의지해야 했다. 착하고 착한 꽃순이. 아직 보낼 준비가 전혀 안 된 우리 아기. 열흘 전만 해도 잘 먹고, 귀찮을 만큼 쫓아다니며 부비적거리던 우리 털 뭉치.
꽃순이가 의식을 잃어버린 사나흘 동안, 미칠 듯한 고통과 보낼 수 없다는 강렬한 본능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이성의 어느 부분에서는 어떻게 이 아이를 보내주어야 할지 잠깐잠깐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옷을 입혀 보내나? 새로 옷을 살까? 좋아하던 물건들을 함께 넣어줄까? 먹는 걸 제일 좋아했는데 간식을 넣어 보낼까?
죽음에 동반할 것은 없다. 화려한 수의, 귀한 재질의 관, 호화로운 부장품, 심지어 산 생명을 순장해 준다 해도 죽음의 엄격함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 잘 알지만, 그래서 나의 죽음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 처리되기를 바라지만, 몸을 못 가누고 축 늘어져 우리에게 안겨 있는, 여전히 따뜻한 우리 꽃순이를 이 추운 겨울에 헐벗은 채 보낼 수는 없었다.
2024년 1월 17일 밤 열 시 십 분. 종일 아저씨 품에 안겨 있던 아이를 내가 안고 자려고 편한 자리를 만들어주고 눕혀 놓았다. 아이가 편안해하는지를 묻는 남편에게 나는 이제 거친 숨소리도 안 낸다고, 편안한가 보다고 대답하는 사이, 상황을 파악한 남편이 번개같이 다가와 아이를 들어 안았다. ‘우리 아기, 갔네!’라는 다급한 외침. 그럴 리 없다고, 이상한 얘기 좀 하지 말라고, 이렇게 평화로운데 무슨 말이냐고 울부짖는 사이에 꽃순이는 인사하듯,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오빠 품에도 안겨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좋아하던 아줌마, 아저씨의 무한한 손길을 받으며.
남편은 그 밤에 외투를 입고 나서더니 꽃을 한 아름 사들고 들어왔다.
‘꽃으로 이불을 만들어 줄 거야.’
아들과 내가 아직 온기가 남은 아이의 몸을 쓰다듬고 오열하는 사이, 남편은 그동안 열어보지도 않았던 오동나무 관을 개봉하고, 꽃으로 치장을 했다. 노랗고 하얀 작은 국화 송이, 안개꽃, 붉은 장미 이파리들.
꽃 위에 눕혀진 아이는 예뻤다. 윤기를 잃은 털은 오히려 보드랍기 그지없었고, 어디 하나 사나운 구석이 없는 순한 얼굴은 숨을 잃고도 여전히 착하기만 했다. 떠나기 직전, 기저귀에 뱃속에 남은 것을 다 비운 터라 가벼워진 몸도 꽃치레 안에서 곱디고왔다.
여전히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큰 바위를 삼킨 듯 숨이 답답하지만, 우리 아기, 우리 꽃순이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예뻐서, 살아있을 때처럼 사랑스러워서, 아프지도 않고 평화로워 보여서 위로가 된다.
꽃순이를 보낸 날은 유난히 포근하고 맑았다. 하늘도 어찌 그리 푸른지. 꽃순이가 이 세상을 잘 떠나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나 보다. 미련해서, 살아있을 때 실컷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뒤늦게 나는 울고만 있다. 그러나 나의 개, 착하고 영민하고 어느 존재보다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우리 꽃순이는 지금쯤 우주를 훨훨 유영하며 짧았던 인연을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안녕, 우리 강아지. 사랑을 주기만 하던 나의 착한 꽃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