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커지기 시작한 10대 중반의 고군분투기
1970년대 후반, 부산은 격동하는 대한민국의 조용한 남쪽의 항구도시였다.
당시 국민학교의 마무리는 중학교 진학의 평준화를 위한 추첨, 일명 "뺑뺑이"로 마무리되었다. 영도에 살았던 나는 영도국민학교를 거쳐 그나마 집과 가장 가까운 여자중학교인 '남도여자중학교'라는 사립여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학교는 도보로 25~3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집에서부터 오르막이었다. 가끔 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버스를 타면 20분, 그중 10분은 걸어야 했다. 그때의 중학교 교복은 학교마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전국이 거의 같은 교복을 입었고, 내가 다니던 학교는 사립중학교이기는 하나 부산의 다른 공립 여중생들과 같은 교복을 입었다. 사진과 같은 세일러복 형태의 상의에 주름치마 교복을 입었다. 치마의 주름을 유지하려고 잠자기 전 주름 잘 잡은 치마를 요 아래에 깔고 자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키가 작고 왜소한 아이였다. 입학식 후 담임선생님이 교실 뒤쪽에 아이들을 키대로 쭉 세우더니 작은 아이부터 번호를 매기기 시작하여 나는 2번이 되었다. 우리 반에서 2번째로 키가 작았다는 의미였다. 1학기 동안 앞에 앉아 수업을 하다가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식날, 선생님은 또다시 아이들을 교실 뒤쪽에 줄을 세우더니 번호를 매겼다. 1학기 동안 키가 많이 자란 나는 10번대에 진입하여 중간쯤인 3번째에 앉게 되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방학을 지내고 오면 키가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생물 과목을 담당하는 남자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광대가 튀어나오고 안경을 낀 얼굴에 키가 크고 깡마른 몸매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생물 수업시간에 나에게 고사리가 무슨 색인지 질문을 해서 나는 "갈색"으로 대답했다. 내가 본 고사리는 밥상에 올라오는 고사리 나물이 전부였으니까. 그 대답에 선생님은 웃으면서 '고사리는 녹색식물'이라 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고사리가 초록색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릴 때 산동네에서 뛰어다니며 놀기는 했어도 고사리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고, 영도로 이사 와서는 시멘트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학교만 다녔기에 몰랐던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대교동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영도에서는 이사를 가더라도 대교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선생님은 내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학급의 부장도 아니었지만 선생님이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었던 것 같다. 하루는 선생님이 아기를 낳았다고 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선생님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 그래서 우리 반 반장이 선생님 댁에 같이 가자고 하여 5~6명의 아이들이 선생님 댁으로 갔다. 선생님이 아기를 안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하는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기억에 남는다.
학창 시절 이야기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매점에서의 추억일 것이다. 이 학교에도 매점은 있었고, 심지어 매점에 온돌방도 있었다. 주인아저씨와 교장선생님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학교 매점은 어두웠고, 항상 멸치 육수 냄새가 났다. 학용품과 기타 간식거리들, 간단한 국수와 라면을 팔고 있었는데, 관리하는 아저씨가 나를 보면 항상 "난이야, 난이야, 사랑하는 난이야~~"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내 필명이 '나니야'이다. 졸업할 때까지 나를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없이 아저씨 세대에서 유행했던 노랫가락을 붙여서 불러 아이들도 가끔 그렇게 노랫가락으로 부르고는 했다. 그렇다고 내 이름이 "난이"는 아니다. 그 매점에서 국수를 먹으며 친구와 영화이야기, 미술이야기 등을 했던 기억은 아직도 아련하다. 당시 영화단체관람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닥터지바고"라는 영화를 단체관람하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와 나는 영화관에서 이미 관람을 했기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매점에서 영화이야기를 했다. '알랑들롱', '찰스 브루스'로 대표되는 영화배우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웨스트스타일의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주름진 얼굴은 10대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밤잠 설치게 했던 미국드라마 "육백만 불의 사나이", "맥가이버", "전격제트작전"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게 했다.
줄 서서 준비물을 사고, 간식을 먹고, 방과 후에는 온돌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그 매점은 중학시절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추억의 한구석이다. 중학시절의 주름치마아래에 입었던 체육복은 지금도 국룰이다. 치마아래에 체육복을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운동장. 남도여중에는 운동장이 아래위로 2개였다. 그 운동장에서 땅따먹기, 시마차기, 오징어게임, 고무줄놀이등을 하면서 중학시절을 보냈다. 어째 공부한 기억은 없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는 중학시절이다. 그나마 친구덕에 도서관에서 책 읽는 재미를 알아서 넓지 않은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학년이 되어 반배정을 받고 번호를 부여받을 때, 난 키가 많이 자랐다. 그 학교는 번호를 키 순서대로 하는 전통이 있었나 보다. 반배정 후 반 아이들은 교실 뒤에서 키대로 줄을 섰고 난 20번대의 번호를 받았다. 그때 한 반의 학생수는 50명 정도였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체육선생님이었던 듯한데,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 못 하는 이유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일수도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 앨범과 졸업장, 상장 같은 것들이 1990년대 어느 홍수에 집이 잠기게 되어 모두 유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진이 없어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그 2학년 때 나는 체육부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는데, 난 '스포츠는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스포츠 선수라는 직업이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체육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체육부장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선생님이 시켰을 것이다. 체육시간이면 체육부장이라는 이유로 시범을 보이는 조교가 되었다. 잘하지 못하는 시범을 해야 했기에 내 학창 시절 12년 동안 체육시간에 가장 많이 움직였던 때였다. 심지어 시범을 잘하기 위해 수업 전날이나 점심시간에 남아서 연습을 했다. 매트리스 위에서 구르기, 낙법과 뜀틀 멀리뛰기, 왕복 달리기 등등을 연습하여 정확한 자세를 익혔다. 그래서 지금도 운동을 싫어하지만 자세는 좋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미안하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책을 많이 읽어 학교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였다. 나도 그 아이의 영향으로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매일 도서관에서 지냈다. 그때 재미나게 읽었던 추리소설, 탐정소설들이 아직도 기억에 있다. 처음으로 '제임스 본드'를 만난 것도 중학교 도서관이었다. 그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다 읽고 아가사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엘러리 퀸 등등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자연히 '분노의 포도', '그리스인 조르바', '제인 에어' 등등의 명작들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를 졸라 '30권짜리 세계명작 전집'을 구입했다. 검은색 양장본에 은색으로 제목을 새겨 넣은 책 30권을 책장에 쭉 꽂아 놓고는 너무나 흐뭇해했다. 헤르만 헤세를 비롯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들을 읽으면서 지식을 챙겼지만 시력을 잃었다. 점점 칠판의 글씨들이 안 보여 인상을 쓰게 되었고, 체력검사 시에 시력이 나쁘다고 안과를 가야 한다고 했다. 병원이라고는 어릴 때 무릎이 찢어져 꿰맨 후로는 처음이었다. 안과에서는 신기한 기계들을 얼굴과 눈에 대면서 검사한 후, 의사는 알 수 없는 숫자들과 기호들을 적은 종이를 주었다. 엄마랑 나랑은 그 종이를 가지고 안경점을 가서 안경을 맞추었다. 신기하게도 잘 보였다. 나에게 도서관을 알려준 친구의 아빠는 형사였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 차이가 좀 났다. 그 아이도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도수가 나보다 높았다. "깨끗한 눈으로 보는 세계는 희미한데, 더러운 안경알 너머로 보는 세계가 이렇게 깨끗한 게 너무 이상하고 화난다"라며 땀 흘린 체육시간이 끝나고 세수하고 난 후 안경 끼면서 한 말이 너무나도 뇌리에 남는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난 안경을 끼면서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친구가 하루는 자신의 집에 놀러 가지고 하여 엄마의 허락을 받고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과 버스를 탔다. 항상 걸어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어딘가에 가면서 버스를 타는 것이 생소했다. 집에 올 때는 나 혼자 버스를 타고 왔는데, 아직도 그날 버스 창밖의 도시의 불빛들이 기억난다. 어딘지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닌 그런 풍경, 해가 지면 거의 집안에서만 지냈던 나에게는 그런 풍경은 타향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체육부장이라는 타이틀로 인하여 여러 학교 행사에 두루 참가했다. 그중 기억 남는 것은 학교 운동회 때는 응원 단장이 되어 큰 밀짚모자에 티셔츠 위로 입은 남방을 허리에서 묶어 멋을 내고는 우리 반 아이들이 속한 백팀 앞에 나가 엉덩이도 흔들고, 팔도 흔들며 열심히 응원을 했고, 결국 응원상을 받았다. 그때 멋 내며 찍은 사진은 없어졌지만 그 사진이 기억에 있다. 15살이던 당시의 나는 생각이 다듬어지기 시작하면서 내 의견을 곧잘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사고가 아니었기에 시행착오가 많았다.
한 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교실 뒤에 세웠다. 앉아서 수업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과 함께. 정확한 기억이 아니라 알 수 없지만 난 억울했던 감정만 기억난다. 서 있던 나는 교실 밖으로 나갔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억울해서 그랬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영어 선생님이(그의 별명이 '개똘아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교무실로 오라 해서 갔더니,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나갔다고 꾸중을 했는데 내가 말대꾸를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나를 때리기 시작했고, 억울하고 화났지만 고집스럽게 그 매를 다 맞았다. 그때 들어온 담임도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라 해서 담임선생님을 노려봤고, 나를 때리는 선생님도 노려봤다. 눈에 화를 잔뜩 담고 맞으면서 버텼고, 주위 선생님들이 말렸는지 아니면 선생님이 화가 멈췄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결국 매질은 멈추었지만 반성문을 써야 한단다. 나는 쓸 수 없다고 했으나 무조건 쓰라고 해 반성문에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나는 억울하고, 선생님이 내 의견을 무시하고 이렇게 때리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라고 썼다. 그 이후 영어 수업시간에 대 놓고 자거나, 딴짓을 했다. 그 후 나는 영어를 싫어하는 아이가 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산수가 어려웠고, 중학교에서는 영어를 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 국어 공부만 열심히 하게 되었다.
3학년이 되고 일 학기 때는 그냥 학교 공부하면서 도서관에서 책 읽으면서 지났고, 이학기가 되었을 때 진학이라는 과제 앞에 생각이 깊어지는 아이가 되었다. 그 당시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가길 바랐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전문직업인이 되는 것이었고, 여자가 할 수 있는 전문직업인으로 "약사"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나는 예술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미술과 글쓰기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성악전공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때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실업계 고등학교를 간다고 했다. 아마도 그 영향이었을까, 집에서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원했지만 난 실업게 미술전공 학교를 희망했다. 결국 고등학교 원서작성에 미술전문학교로 써냈다가 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었고 나는 선생님에게 그 편지를 전했는데, 아이들이 다 보고 있었나 보다. 소문에 내가 돈봉투를 건넸다고 했다.
집과 학교에서 기나긴 상담의 시간을 거쳐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썼다.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우울해졌다. 그 시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며 많은 생각들을 시작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그 생각들 중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포함된다. 3학년은 그렇게 재빨리 지나갔고, 고등학교 원서를 쓰고 발표를 기다렸다. 보조개가 귀여웠던 친구는 여상에 합격을 했고, 난 2차 발표인 인문계 고등학교의 합격 발표를 기다렸다. 어떤 방식으로 선정되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영도여자고등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그해 겨울방학에 졸업식을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텔레비전만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중학시절은 머리가 막 커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제 막 생각이라는 것이 영글고 점차 어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른이 되어가는 첫 계단에 발을 올리는 시기이다. 학창 시절은 대개 고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은 중학교 시절에 학창 시절은 시작된다. 초등(국민)학교 시절은 이제 막 아동기를 벗어난 아이들이 10대에 들어서는 4~6학년에 본인들의 색깔을 가지기 시작하는 시절이다. 그러나 중학시절은 본인들의 색깔을 점차 확립하여 색깔이 바뀌기도 하고, 더 짙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짙어지고 바뀐 색깔의 인격들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설계와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위해 이것저것 경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느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은 대부분이 중학시절인 10대 중반에 이루어져 10대 후반의 고등시절에 완성된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사회라는 곳에 적응하기 위해 내 색깔을 감추거나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열여섯 나이의 결정이 미래의 경험을 좌우할 수 있게 된다. 인문계 학교의 경험과 실업계 학교의 경험은 사회생활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은 항상 결정의 연속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매일매일 아주 사소한 결정들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떠 잠에서 깨는 것이 몇 시 인지부터 결정은 시작되어 출근하는 길은 어디로 가야 하나, 점심은 어디서 무얼 먹을까, 상사에게 인사말은 어떻게 할까, 커피는 믹서를 먹어야 하나 아아를 먹어야 하나, 퇴근할 때 마트에 들를 것인가 등등의 많은 선택을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선택의 반복으로 하여 지금의 내가 완성된 것이다. 우리는 습관처럼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선택은 항상 후회를 동반하지만 인생은 되돌릴 수 없는 직선 위를 걸어가는 것 같아, 그 열여섯의 결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생이던 1979년의 부산은 심란하고 역동이 꿈틀대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은 유신정권과 일명 "부마항쟁"이라고도 하는 큰 시위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영도다리를 마주한 중앙동에 있던 시청 앞에는 탱크와 군인들이 깔렸다. 그렇게 철없는 나의 열여섯의 선택과 시대의 큰 물결이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