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부평시장, 깡통시장, 자갈치시장은 모두 남포동에 포함된다.
청소년기에 접한 환경은 삶의 모양을 만드는 기본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청소년기의 활동이 생을 어떻게 꾸려 나갈것인지 계획을 하는 단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나의 10대, 학창시절은 주로 영도구를 중심으로 중구, 서구, 사하구에서 보냈다. 주 활동무대가 중구를 중심으로 서부산쪽으로, 그 중 중구는 영도다리를 건너면 바로 접하는, 시청을 중심으로 남포동과 중앙동으로 연결이 된다. 영도에서 영도다리를 건너 오른쪽의 시청이(지금의 롯데몰 건물) 이어지면서 시청 건물 바로 뒤 바다로 연결되는 도로를 돌면 경철청이 있었다. 영도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교차로의 제일 왼쪽길이 영도다리 아래로 연결되며 자갈치 시장으로 이어진다. 자갈치 시장은 영도를 마주보는 바다쪽으로 형성된 어판장이 시장으로 형성된 곳이다. 교차로에서 왼쪽 두번째 도로는 남포동으로 이어지는 큰도로이로, 작은 사이도로 같은 느낌의 세번째 도로는 남포동쪽에서 오르는 용두산공원입구로 연결이 된다. 용두산공원의 입구는 여러개가 있지만, 그 중 남포동쪽에서 오르는 입구는 180개의 계단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생겨 쉽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어린시절 그 계단을 오르고 올라 도착하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늙어서(?) 계단으로는 오를 수 없고 문명의 힘을 빌려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남포동을 지나면 남포파출소뒤로 형성된 '먹자골목'이 나온다. 이 먹자골목이 남포동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나의 10대에는 점포들이 늘어선 도로 중앙으로 음식을 진열하고 낮은 판의자를 두어 앉아서 먹는 구역을 지나면 개조한 손수레에 음식을 차려 놓아 서서먹는 구역이 쭉 늘어선 골목의 끝에 일명 '깡통시장'이 나타난다. 이 '먹자골목'과 '깡통시장'은 같은 공간, 다른 느낌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어릴때는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머리속에 '먹자골목'의 인상만 가득 남아있다가 20대가 지나서야 '깡통시장'과 분리하여 기억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국제시장'도 기억에서는 같은 곳으로 기억 하지만, 나중에야 셋이 다른 시장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남포동은 이들 시장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주소로는 엄연히 남포동, 광복동, 신창동, 부평동, 대청동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걷다보면 어느새 연결되는 큰 시장통이 있는 셈이다. 겨우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장이 '자갈치시장'이다. 자갈치시장은 국제시장이나 부평시장과는 다른 이미지인, 생선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바닷가의 수산시장과 연결되어 있어 확연히 구분되는 시장이다. 대부분의 부산사람들의 이미지에 자갈치시장은 '꼼장어에 소주 한잔'으로 통한다. 그만큼 수산시장의 횟집보다는 양파 양배추등의 야채와 함께 은박지에 말아서 연탄불에 익혀먹는 꼼장어는 특유의 씹히는 맛과 바다의 갯냄새와 함께 추억의 음식과 장소가 되었다.
나의 젊은시절, 부산의 번화가는 남포동에서 서면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언니 오빠들의 20대의 추억이 남포동이라면 나의 20대의 추억은 서면이다. 그러나 10대의 추억과 함께 20대의 일부를 남포동이 차지하는 것은 내가 살던 동네가 남포동과 가까운 영도와 대신동이었기 때문이다. 영도에서 고1까지 보내고 하단에서 몇개월을 살다 대신동으로 거처를 옮겨 대학 졸업을 하다보니 당연히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약속들은 거의 남포동이었다. 남포동에서는 여차하면 대신동까지 걸어서 갈수 있다는 생각에 술약속의 대부분은 남포동이었고, 학교에서 하는 행사 후의 약속은 대부분 서면과 조방앞이었다. 조방앞... 지금도 그 이름인지 궁금하다.
아뭏든 남포동은 많은 추억을 가진 이름이다. 남포동의 첫기억은 통행금지가 해제되던 1982년 1월의 그날, 통행금지가 없어지던 그날, 우리 가족은 남포동을 갔다. 전부 10대였던 우리 형제들과 엄마 아빠 그리고 삼촌 이모들과 같이 남포동의 먹자골목에서 물떡과 어묵, 당면을 먹었다. 음식 수레가 줄지었고, 그 밤에 사람들이 많았고, 쌓아놓은 음식 옆에서 타들어가던 가스등의 불빛과 양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섰던 간판의 조명들, 그리고 작은키가 닿지 않아 까치발을 들면서 무슨 음식이 있나 살펴보던 나와 동생. 어른들의 뒷모습만 보면서 걸었던 그날의 밤공기는 거의 반백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도 기억이 생생하다. 잊고 지난 그날의 기억이 의식의 흐름따라 적어가면서 새록새록 떠오른다.
통금에 대한 기억은 잘 없다. 어리기도 했지만, 일단 해가 져서 집에 들어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밖에 나가지 않았던 10대 시절에는 통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당연히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지금도 '다큰 처녀가 밤에 어딜 나간다고...'라는 말을 하던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쉬어야하기 때문에 나가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포동의 기억은 낮보다는 밤 기억이 많다.
불교로 종교활동을 하던 10대 후반, 불교학생회의 연합이 광복동 한복판에 있었던 '대각사'에 적을 두고 있었기에 연합법회를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의 많은 시간을 태종대의 '태종사'와 광복동의 '대각사'에서 보냈다. 당시로도 번화가 안의 절이라는 것이 참으로 생소하면서도 좋았다. 경건함과 세속적인 것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대각사는 가정을 꾸리는 대처스님이 계시던 곳이라 우린, 출가승과 대처승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래서 남포동일대의 골목과 용두산 공원으로 연결되는 백화점의 옥상을 자주 이용했다. 계단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지금은 그 백화점 건물에서 용두산 공원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연결된 다리가 아직도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남포동은 그렇게 나의 10대를 보낸 추억의 장소이다. 그런 남포동에는 극장도 밀집되어 있었다. 부산극장, 국도극장의 개봉관과 재상영관인 왕자극장까지. 물론 서면의 극장가도 존재하지만 부산극장은 당시 개봉 상영관으로 인기가 있던 곳으로 조조할인과 함께 주말의 야간 상영도 있던 곳이었다. 어느날부터 부산영화제가 시작되면서 남포동의 극장이 있던 골목이 영화의 거리로 단장되어 예전의 향수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또 나름의 매력을 가진 남포동이 되었다. '남포동'이라는 지명도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물론 부평시장, 먹자골목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지리적으로 쭉 연결되는 자갈치, 남포동, 먹자골목, 부평시장, 국제시장 그리고 용두산공원과 보수동 책방골목의 그 모든 지명들을 '남포동'이라는 세글자에 포함시켜 영도다리를 벗어나서 만나는 신세계였다. 나름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나는 산에서 풀피리 불던 추억은 없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등굣길의 건물들과 가끔 가족들과 나들이 갔던 용두산공원, 동래산성으로의 추억과 성인이 되어 취업을 위해 기차타고 서울로 갔던 부산역, 서울에서 내려와 부산역 앞의 텍사스촌에서 만났던 친구들, 그리고 그 주변의 건물과 시설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나의 어린시절은 그렇게 촌스럽지 않았다. 다만 생각이 많았던 친구들(?)을 둔 덕분에 등사기로 만든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숨어있던 영도와 남포동의 골목들, 그 친구들과 어울려 나누었던 미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지리적인 남포동에 추억이 묻히는 순간, 남포동은 장소가 아니라 추억과 기억으로 저장되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의 남포동은 10대와 20대를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다. 바다를 곁에 두고도 바다가 아닌듯한 분위기를 만드는 남포동에서의 추억은 나에게 아주 깊은 사색과 그리움의 장소로, 이제는 그렇게 기억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의 브런치북은 거의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간다.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도 의식의 흐름을 그냥 유지한다. 내 의식에서 꺼내는 장소와 추억은 그냥 의식대로 흘러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성도가 낮을 수 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적는 글을 고쳐쓴다는 것도 참 힘든일이다. 글을 적을 당시의 의식이 적고나서의 의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추억을 공유하는 부분들로만 이해하면서 읽어 주기 바란다.
나는 가끔, 어린시절 잘 갔던 곳에 대한 꿈을 꾼다. 그런데 꿈속에서 나는 거의 어른의 모습으로 어린 나를 관찰한다. 어쩌면 그 꿈의 영향으로 그때의 장소를 더 잘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서대신동 로타리에서 돌아나갔던 버스 노선이나 남포동을 지나 충무동 사거리를 돌아 자갈치 시장을 거쳐 영도로 들어갔던 버스노선 같은, 그런것 말이다.
오늘도 나는 부산을 추억하고, 부산의 일부에 대한 옛날이야기를 한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일들은 이미 20세기의 일들이고 그래서 옛날일들이다. 나도 어느새 옛날일을 이야기하는 옛날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