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비의 나와 노란 우비의 재순이가 거닐던 비바람 치던 절영로의 기억
십 대에 있어 중학시절은 짧고 빠르게 지나 조각된 기억들만 저장된다. 하지만 고등 시절은 많은 기억을 가진채 20대를 준비하고, 그 기억들이 30-40대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60년대생들의 고교 시절은 새마을 운동이 끝나고 정권교체를 외치던 선배들의 노력과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젊은이를 억압한 정권의 대치로 기억된다.
하지만 60년대생이라고 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60년대 초반 베이비붐 세대는 전쟁 후 생활터전을 이루어야 하는 부모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아이들로 모든 세상의 변화를 견뎌야 하는 세대였고, 60년대 중반생들은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로 그런 형, 언니, 오빠, 누나들의 행동과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동조하기도, 비판하기도 하며 형들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변화를 개척하는 세대였다면, 60년대 후반생들은 베이비붐이 지나간 세상의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안정시킨 세대였다. 그래서 60년대생들 사이에는 3년의 터울로 세대 간의 이해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
60년대생들은 안다, 62년생과 67년생은 다른 세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60년대생들도 70년대생들과의 세대차이를 한 세기의 차이처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지만, 결코 70년대생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꼰대이기도 하다(이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난 영도에서 10대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탈영도'를 꿈꿨지만 동삼동에 위치한 영도여고로 배정받았다. 영도를 떠난 것은 국제정세로 인한 경제의 위축으로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접으면서 드디어 영도를 떠나게 되었지만 학교는 영도에서 졸업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을 하고 반배정을 받는 일련의 시간들이 있었겠지만 내 기억에는 없는 시간이다. 고등학교 1학년의 학교생활은 나의 인생에서 그럭저럭 지나간 시간으로 특별한 사건이 없이 지났다. 원하지 않은 인문계를 진학하게 된 것이 나는 싫었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별로 기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난 중학교 졸업 후, 그 중요하다는 방학기간 동안 집에서 마냥 놀고먹었다. 어느 누구도 학원에서 고등학교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의 부모님도 첫째인 나를 어떻게 공부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 중요하다는 입학 전 겨울의 약 3개월을 소설과 만화에 빠졌고, 좋아하는 텔레비전만 보면서 보냈기에 공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입학 후 수업시간이 재미없었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는 현재의 동아리 활동 같은 활동들이 있어 마치 꼭 해야 하는 활동 같은 느낌이었으며,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권유로 봉사단체인 RCA에 가입했다. 그 활동으로 영도를 벗어나 중앙동, 토성동 등의 RCA센터나 회관등으로 진출(?)을 했다. 그해 봄, 모내기 봉사 활동으로 김해평야의 논에도 다녀왔다. 기억 속 여고시절의 나는 약간 수줍어하며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면서도 간혹 혼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아이였다. 지금의 표현으로 '4차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중학교 때도 그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수업은 준비 없이 입학한 나에게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학교의 아이들이 단과학원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도 대신동에 있는(아마도 대신학원이었던 듯하다) 수학 단과 학원에 등록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가면 후끈하게 달아오른 아이들의 열기와 선생님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로 인하여 흥미는 없었지만 그 열기 가득한 분위기는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아마도 '수학의 정석' 강의를 신청했고, 정말 많은 아이들이 수강하는 강좌여서 교실은 크고 넓어서 뒷자리에서는 선생님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 선생님은 마이크로 수업을 했고, 열정 가득한 아이들이 일찍 감치 앞자리를 차지하여, 수업을 마치고 영도에서 대신동까지 가면 항상 중간 뒤쪽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강의의 내용은 기억 안 나면서 그 분위기는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각인되어 학원물 영화나 그 시대의 청춘영화를 볼 때면 간혹 기억나고는 한다. 그 학원을 다닐 때 같은 학원의 남학생이 나 좋다고 강의가 끝난 후 버스 타고 우리 동네까지 따라왔던 적이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내 가방까지 들어주며 여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다. 나는 당시 당혹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 아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었나 보다. 지독히 모범생처럼 안경을 낀 자그마한 키의 아이였는데, 지금도 인상착의가 기억난다. 하지만 난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다음 달, 학원을 등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 감정이지만 그렇게 마음이 설레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옆집 사는 또래의 남자아이에게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교동에서 영도여자고등학교까지 가는 버스 노선은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영도다리를 지나 직진하여 소방서를 끼고 좌회전하는 코스로 해동병원, 봉래동, 청학동을 지나 태종대와 동삼동으로 갈리는 길에서 동삼동 쪽으로 가는 노선과 영도다리를 건너와 경찰서를 지나 우회전하여 해동 중고등학교, 영도여자상업고등학교, 신선중학교를 지나 해안도로를 쭉 지나면 나오는 동삼동이 종점인 노선이 있었다. 당시의 동삼동은 논밭이 존재하는 바다를 낀 산동네로 바닷가의 부산남고등학교와 부산체육고등학교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우측의 바다가 보이는 쪽의 벌판에 체육고등학교의 운동장이 있고, 그 운동장의 좌측의 산 쪽으로 내가 다닌 영도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산 중턱에 여동생이 다닌 영도여자중학교가 있는 이른바 캠퍼스 같은 느낌의 학교만 있었다. 집이 모여있는 동네는 청학동 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는 한정거장쯤에 미장원과 분식집, 만화방이 있었고 도로 쪽으로 건물들이 있었다. 그 버스 노선 중 경찰서를 지나 우회전하는 노선은 영도의 많은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노선으로 아침에는 학생들 외의 승객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 노선의 버스를 우린 통학버스라 불렀다. 등하교 시간이면 통학버스라는 표현 그대로 교복 입은 학생들만 타고 있는 그 버스 안 풍경은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이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버스 안의 청춘로맨스, 그리고 남학생들 간의 주먹다짐, 그쯤 해두자 ㅋㅋㅋ. 남자고등학교와 여자고등학교가 걸치는 노선이라 국민학교 동창들의 얼굴도 가끔 보이고, 매일 같은 시간에 보는 얼굴들도 많았다. 가끔, 매일 보던 얼굴이 안 보이면 궁금해서 창밖을 살피다가 뛰어오는 모습에 다 같이 소리 지르며 기사님에게 문을 열어달라 하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미소가 새어 나온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그렇게 풋풋하게 남았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친구가 "너는 당시 아이들에게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라고 한 말로 추측하건대 나는 아마도 좀 특이한 아이였던 듯하다. 입학 전 주구장창 책만 읽었던 나에게는 당시 아이들에게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나의 독특한 분위기로 한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아 '불교학생회'라는 곳에 가입하게 되면서, 나의 고등학교 생활과 10대의 사고력은 불교를 만나 더욱 독특하게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들게 되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의 환경으로 인해 바다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면서 바다의 매력에 빠진 나는 아직도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한다. '젊은 날의 바다'하면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바람이 살랑거리던 어느 초여름의 따뜻한 날에 점심을 빨리 먹고 반친구 한 명과 학교를 빠져나와 남고등학교와 체육고등학교를 지나 횟집이 몇 있던 바닷가의 해변으로 향했다. 그 해변은 모래가 아닌 자갈이 깔린 태종대의 해변과 같은 곳이었다(사실 산을 하나 넘으면 바로 태종대의 자갈해변으로 연결되어 있다). 군부대의 보초대가 있던 그 해변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연결되어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지만 바다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으로 향한 해변이었다. 얼마 안 되는 점심시간을 할애해서 도착한 자갈해변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했지만 막막한 바다 위에 쨍하니 떠있는 태양이 바다를 더 예쁘게 만들었다. 해변으로 통하는 입구의 넓은 바위에 앉아 '내가 저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이 있을까? 저 잔잔한 바다에 내가 빠지면 표시가 날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 나 하나 바다에 빠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학교로 올라오는 길에 다시 바다를 바라보며 '나 하나 없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세상이니 죽지 말고 살아야지,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살아야지, 사는 게 지겨워질 때까지 살아야겠다'라는 엄청난 생각을 했다.
그 후 살면서 가끔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의 감정을 생각하며 '나 하나 없어진다고 달라지는 세상도 아니니 내가 왜 없어져야 하지, 난 오래 살 거야. 벽에 똥칠할 때까지'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왜 젊은 시절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잊었지만 그때 아마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읽고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 사는 게 힘들고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허무주의의 끝에 사회주의를 알게 되어 막스주의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그것도 고등학생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따뜻한 도서관의 책상에서 두꺼운 양장본의 전집의 책에, 한쪽에 두 칸의 세로 쓰기로 써져 읽기도 힘들었던 그 책을 열심히 읽었던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왜 그렇게도 궁금한 게 많았던지...
고등학교 친구 중 '재순'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도 책을 많이 읽는 아이로, 나와 문학적 취향이 비슷하여 가깝게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해인의 수필을 좋아하던 그 아이의 영향으로 이해인의 시와 수필을 알게 되었고, 윤동주와 한용운을 좋아하던 나는 그녀에게 나라 잃은 정서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우린 세상은 살기 힘든 곳이고, 나의 존재는 수많은 인구 중 하나일 뿐이라고 종종 한탄하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허무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허무주의를 찬양하기도 했다. 나는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불교에 심취했고, 그녀는 성당에 다니는 천주교신자였다. 주위의 아이들은 이 이상한 조합을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우린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의 문학적 취향을 공유했다. 그녀와 나는 국문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지만 동기는 서로 달랐다. 나는 문학에 그녀는 어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음운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바람을 좋아하는 그녀와 비를 좋아하는 나는, 태풍 치는 해안도로 걷기를 좋아했는데, 우린 다른 반이었지만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하교길에 만나서 노란 우비의 그녀와 빨간 우비의 내가 버스만 다니는 해안도로를 걸으며 하교를 했다. 그러면 버스를 타고 가던 국민학교 동창 남학생이 소리 지르며 버스 타라고, '너 미쳤냐 이 비바람 부는데...'라며 버스창밖으로 머리 내밀며 소리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래도 우리 꿋꿋이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가 해안도로가 끝나고 마을이 나오는 어귀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그녀는 집은 아마도 당시 법원이 있었던 토성동 어디였던 것 같고, 당시의 나는 서대신동에서 살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같은 듯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로도 태풍 치는 날이 되면 그녀와 같이 걷던 그 해안도로를 가끔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우리의 꿈과 희망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그 우울한 허무주의와 다 헤어진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기억했다. 생활이 바빴던 20-30대를 지나 육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40대를 지나며 가끔 빠졌던 추억과는 달리 옛이야기를 서술하기 시작한 요즘, 그날들의 기억이 더욱 생생한 것은 뇌에 박힌 나의 강렬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요즘은 과거의 기억이 더욱 또렷해진다. 과거가 더 기억나는 것은 치매라고 하던데... 쩝. ^^
60년대생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70년대 후반과 80년대가 가장 청춘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이 아름답게 각색되어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 7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역동적인 시간이 부산이었고, 그중 나의 주 생활지역이었던 하단, 대신동의 서부산과 영도이다. 젊은 시절의 많은 부분을 보냈던 영도를 부산에 살면서도 생활이 바빠 잘 방문하지 못했다. 부산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넘어가본 영도는 많이 변해있었다. 대교동은 거의 변한 것이 없었지만 대평동과 신선동 일대는 문화공간으로 재창조되었고 청학동, 동삼동은 너무 많이 바뀌어 잘 인지가 안되었다. 산 중턱에 있었던 학교는 바닷가 동네의 변두리에 속해있었고, 매점의 뒷문으로 미술수업을 갔던 논밭은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섰고, 영도여자중학교는 태종대중학교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남고등학교와 체육고등학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학교의 건물들은 많이 늘어나 넓었던 운동장이 좁아져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우울한 생각을 했던 그 해변은 방파제 공사를 했고, 군초소는 없어지고 전망대가 세워졌다. 그래, 그쪽에서 바라보던 노을이 멋지긴 하지. 그리고 내가 거닐었던 그 해변에는 경찰초소가 하나 들어섰다. 횟집이 있었던 해녀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외관이 바뀐 상태였다. 20대에 부산에서 생활하며 해녀촌에서 탈수기에 탈탈 털어 초장에 비벼 먹었던 아나고회라고 부르던 장어회가 기억난다. 부산사람들이면 다 아는 물기 없는 가제수건에 꼭 짜서 초장에 비벼 먹는 그 아나고회를 말한다.
지금은 절영로가 해안산책로 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신선동으로 연결되는 도로까지의 산책로 아랫길의 그 해안촌에서 영화 "변호사"가 촬영된 후, 바닷가의 그 다닥다닥하던 판자촌이 '흰여울문화마을'로 조성이 되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던 그 길이 이제는 영도의 절경을 볼 수 있게 정돈되었다. 그 절영로는 드라이브를 해야 멋지다.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보다는 드라이브를 하며 중간에 차 세우고 바라보는 바다가 더 멋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추억하는 어린 시절에는 우울함이 없다. 설사 우울한 장면이라도 기억은 각색하여 저장한다. 나는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억에 의존하여 추억을 기록한다. 참... 그렇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더욱 추억을 꺼내보리라. 그때의 나를 지금보다 시간이 더 지나서 기억하면 또 어떤 기록이 나올까 궁금하다.
사진의 절영로는 구글에서 떠도는 사진으로 지금 정리된 절영로 아랫길로 흰여울문화마을과 이어지는 산책로로 만들어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