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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Feb 22. 2024

예방접종이라 적고 불주사라 읽는다.

부산을 떠나기 전, 나는 예방접종을 하러 돌아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상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던 나는 공백을 이용하여 동래구 보건소에서 예방접종 요원으로 아르바이트(지금의 기간제)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새 학년이 되는 봄이면 정부에서는 각 학교, 특히 국민학교의 저 학생을 대상으로 예방접종 사업을 시행하였다.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어릴 때부터 접종을 권유하나 지금처럼 아주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았었기에 학령전기에 예방접종을 하지 못한 아동들도 많았다. 또한 '결핵퇴치사업'의 일환으로 전 국민 예방접종 완료를 목표로 건강관리를 하던 때라 봄학기의 예방접종은 학교사업뿐 아니라 국민건강사업과도 연결이 되어 각 보건소는 봄에 무척 바쁘다. 물론 지금은 보건소나 의원, 병원에서 접종을 하지만 당시의 병원에서의 접종이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백신의 공급문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백신은 한 개를 개봉하면 사용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 시간 내에 사용 인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 비싼 백신은 폐기처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백신을 보관하기 위한 냉장시설도 필요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병원에서는 백신을 사용한 접종을 하지 못하였고, 더하여 의료보험이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시기로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는 접종 사업을 시도하는 병원은 거의 없어 국가지원 사업으로 시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보건소에서는 딱 그 시기에만 필요한 예방접종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서 다른 사업에 속했던 간호직 공무원들을 사용하지 못했기에 기간제로 인원을 충당하였다. 그때 정부의 가장 큰 사업인 "가족계획사업"은 보건소에서의 핵심 사업으로 간호직 공무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방접종 사업은 "국민건강사업"에 속하는 것으로 결핵사업과 함께 보건소의 주요 사업이었지만 봄이면 인원부족으로 예방접종 요원을 따로 채용하여 업무를 맡겼다. 이 예방접종 요원의 주 업무는 학교와 단체들을 방문하여 예방접종 주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한 반의 인원이 30명 안팎이지만 20세기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 한 반에서 50명 정도의 아이들이 수업을 받았다. 

보통 예방주사는 저학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관할 구역 내의 예방접종 실시 날짜와 접종백신의 종류는 이미 작성이 되어 있었고, 나는 출근하면 준비된 백신과 주사기등의 준비품을 챙겨 제공되는 차량으로 이동하여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다시 보건소로 돌아와 물품을 정리하고 다음날의 스케줄을 위해 백신의 수량과 소모품(주사기와 알코올솜 같은)을 챙겨둔다. 그리고 청소를 하면 마무리가 된다. 접종 스케줄이 없는 날은 사무실을 지키며 실내 업무와 선생님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는 날이 반복되었다. 가끔 결핵실에 도움이 필요하면 몇 시간 도와주기도 하였다. 당시 업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던 시절이라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꿀직업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방주사에 대한 나의 기억에도 국민학교에서의 예방주사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길게 줄을 서 알코올램프 심지의 불에 주사바늘을 달구어 맞았던 일명 '불주사'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았다. 나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 초까지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그 '불주사'에 대한 추억이 하나 이상씩은 있으리라 장담한다. 아마 왼쪽 팔에 있는 그 추억의 주사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검정고무신'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추억의 한편처럼 말이다. 나는 그때 그런 일을 하는 예방접종 요원이었다. 하지만 램프의 심지에 주사바늘을 달구어 접종을 하던 불주사는 그때에도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당시의 단체 예방접종에서는 일회용 주사기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접종으로 한국도 서서히 위생에 대한 개념과 예방의학이 정립되기 시작하면서 국가적인 사업이 되어 국가에서는 일회용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동네 의원들은 소독해서 사용하는 유리주사기가 아직 존재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을 켜지는 않지만 '불침을 맞은 만큼 아프다'라고 하는  BCG(결핵) 예방접종의 경우 흉터가 남아 이를 불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근무하던 보건소 근처에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나만의 추억의 맛집'이 있었다. '추어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을 처음으로 먹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내 입맛에 딱 좋은 맛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추어탕을 기억하며 추어탕 맛집들을 방문해도 당시의 추어탕맛을 재현하는 곳을 찾지 못했다. 된장베이스에 추어를 갈아 만든 그 추어탕. 아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상호명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메뉴가 '추어탕' 달랑 하나였던, 된장베이스의 국물에 잔뜩 갈아 넣은 추어가 방아의 향과 함께 입안에서 걸죽이며 목으로 묵직하게 넘어가는 강한 음식이었지만 종종 생각나는 맛의 음식이었다. 좁은 실내의 그 식당에는 벽을 따라 설치된 기다란 탁자에 앉아 벽을 마주 보고 음식을 먹는 아주 오래된, 전쟁 직후의 음식점을 생각나게 하는 실내로 밖에서 보면 벽을 보고 앉은 뒷모습만 보이는 좁은 가게였다. 나무에 비닐 장판을 깔아서 만든, 일자로 길게 벽에 딱 붙은 테이블과 줄줄이 놓였던 등받이 없는 의자 대여섯 개, 그리고 한쪽에서 끓고 있는 추어탕 솥이 전부인 아주 낡은 가게의 추억은, 기억해 내는 지금도 추어탕의 맛이 입안에 돌고 있다. 말 그대로 내 인생의 추어탕으로, 이후로는 그곳으로 갈 일이 없어 재방문이 없었지만 내 '추어탕 맛'의 기준이 된 곳이다.

당시 부산에는 지하철이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그 보건소는 지하철역 출구의 작은 개천을 지나 도보로 5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장소에 있다. 대신동에서 왜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한 번에 도착하는 버스가 없었거나 지하철을 타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당시 나와 같이 보건소 기간제로 근무했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제대 후 복학하기 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보건소에서 막내였던 둘을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했던 선생님들의 장난기 어린 대화들과 눈빛이 기억난다. 보건소에서 내가 근무하던 건물이 별관이라 본관을 가려면 보건소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별관에는 가족계획 관련과 와 예방접종 관련과가 모여있어서 간호직공무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행정적인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본관에 가야 했었다. 그런 자질구레한 업무도 막내인 내가 담당하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외는 주로 별관에서 근무했기에 본관 선생님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당시 20대의 풋풋한 직원이 몇 안되었기에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을 듯하다.

그 보건소에서 2개월 정도 기간제 생활을 하던 중, 대학의 담임교수님으로부터 외국 취업에 대한 안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사우디아라비아'로의 취업을 준비하러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20대에 부산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후 대한민국을 떠나 있다 돌아와 부산에 잠시 머무르다 다시 대한민국을 떠났다. 그 후 돌아온 것이 90년대 중반이었다. 

1988년에서 1994년까지 1번의 긴 방문과 1번의 짧은 방문을 빼면 6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온 부산은, 아니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해 있었고,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90년 이후의 공백은 나를 시골뜨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이미 대한민국과 부산은 내가 알고 있던 어린 시절의 부산과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그리고 적응한 부산에서 IMF라는 아주 대단하고 기가 막힌 사건을 접하여 2000년, 주거지를 완전히 옮기면서 부산과의 인연은 멀어지고 지인들도 남아있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 처음으로 부산을 떠나기 전 근무했던 동래구 보건소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서 존재감을 뿜고 있을 것이다. 그때 같이 근무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선생님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당시 30대였던 선생님들은 이미 은퇴했을 테니까...


보건소에서의 기억은 접종을 위해 걸었던 학교의 운동장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의 식당들을 찾았던 기억과 보건소 마당을 가로질러 본관으로 갔던 기억, 그리고 연기소독을 위해 소독기를 준비하는 트럭의 뒤에서 소독연기가 잘 나오는지 확인해 주고 출발하는 트럭에 손 흔들어 주던 기억이 전부이지만 생각할수록 새롭다. 내 20대의 짧은 한 장면이라 생각하니 여태껏 잊고 지낸 것이 아쉽기도 하다. 이 글을 작성하지 않았더라면 기억에서 끄집어내지 못했을 추억이라는 생각에 새삼 글을 쓰는 지금이 참 고맙다.   



20세기의 부산은 역동의 시간들을 견뎌냈다. 부산은 대한민국의 제2의 수도이고, 세계의 무역항이 있는 곳이며, 일본으로의 접근성이 좋아 일본색이 짙은 도시이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부산은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들과 겹쳐서 부산에서는 영화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부산은 그때부터 위기의 순간들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20세기의 부산은 추억과 함께 아련하다 못해 흑백의 시간들을 간직한 영화 같은 감상으로 남는 도시인지도 모르겠다.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은 부산을 시작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부산에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2000년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부산을 떠났다. 그래서 부산은 나에게 20세기의 도시로 남아있다. 한 세기 전(?)의 추억이 묻어있는 도시, 부산은 이제 낯선 곳이 되었다. 코로나가 번창하기 전 부산으로 2박 3일의 여행을 가졌다. 복잡하고 힘든 사회생활의 한 귀퉁이를 정리하기 위해 나에게의 선물처럼 출발한 부산은 친근하면서도 낯선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20대의 몇 년을 떠났다가 돌아간 부산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돌아왔지만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옛 동네처럼 서먹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그런 느낌의 도시가 되었다, 부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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