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서점이 위치했던 학교와 카프카와 빅셀, 그리고 그 풍경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점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나의 첫 번째 추억의 서점은 1970년대 후반, 당시 부산시 영도구의 해동의원이 있던 근처의 시장 입구에 위치한 작은 서점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만약 현재까지 존재했다면 해동병원 별관이 있는 건물 근처일 것이다. 작은 서점에서 앞발을 치켜든 말 등위에서 손을 들고 있는 나폴레옹의 그림 사진이 인쇄되었던 참고서를 샀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시작으로 참고서, 자습서, 동화 등등을 구입하면서 국민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얄개시리즈를 접했다. 얄개시리즈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당시의 유명한 청춘소설이다. 참고로 '고교얄개'의 주인공은 이승현이었고 주인공의 누나로 정윤희가 출연했었다.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가 많았던 작품으로 책으로 읽고 나서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의 두 번째 추억의 서점은 영도여자고등학교 정문 옆에 있던 "예림서점"이다. 궁금하여 확인한 지도에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예림서점은 학교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작은 문방구도 겸하고 있던 서점이었다. 서점 주인부부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한다. 서점 안쪽으로 작은방이 하나 딸려있는 구조로 학생들이 자리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는 것이 허용되던 서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방과 후 자습시간에 따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 로맨스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가끔 점심시간에 그곳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주인아저씨가 수업 종 쳤는데 안 가냐고 다그치던 생각이 난다. 그 서점에서 카프카의 '변신'과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작가는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로맨스소설에서 벗어나 고전이라는 장르를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서관에서 철학 서적을 탐구하게 되었다. 내가 동화를 벗어나 얄개시리즈에서 카프카, 카뮈를 거쳐 믹스 붸버, 칸트까지 이르는데 4년이 걸렸다. 그 기억의 많은 부분이 이 "예림서점"의 추억이다. 졸업 후 외국취업을 위한 영문 졸업장을 받기 위해 학교에 갔다가 한 번 들렸는데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기억 못 했다. 아마도 아저씨가 있었다면 기억했을 텐데...
학교는 당시 건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아래의 사진은 지금 현재의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트랙이 있는 저곳이 체육고등학교 운동장이다. 당시에는 그냥 맨 흙바닥이었다. 4층에서 내려다보는 체육고등학교 운동장에는 반듯한 흙바닥을 타이어를 매달고 운동장을 돌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그들 뒤로 보이던 탁 트인 파란 바다에 주황으로 물들어가는 석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도 아마 석양은 아름다울 것이다. 학교 뒤로 보이는 저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논과 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넓은 도로가 생기고 집들이 들어선 모양이 낯설다. 학교 뒤쪽도 사진의 왼쪽처럼 숲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학교의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도 당시는 숲이었고 주차장의 오른쪽으로 첫 번째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예림서점"이 있는 자리이다. 동생이 다니던 영도여자중학교는 태종대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세월의 흔적이겠지만 동생에게는 슬픈 소식이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이 다니던 학교가 없으졌으니 말이다. 나는 졸업한 모든 학교가 아직까지 존재한다. 영도초등학교, 남도여자중학교, 영도여자고등학교, 춘해간호대학(이 학교는 다른 장소로 옮겨 존재한다) 그리고 방송통신대학교. 그것도 추억이라고 간직하는 내가 있으니 존재하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영도여자고등학교가 있던 동삼동(당시는 '동삼중리'라고 했다)은 많이 변했다. 당시 버스 종점 앞에는 남고등학교, 체육고등학교가 있고 그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의 모교 영도여자고등학교, 산 쪽으로 더 올라가면 동생의 모교인 영도여자중학교가 있었다. 버스종점과 학교 사이에는 집은 몇 채 없고 나무와 밭이 전부였고 버스가 다니는 아랫길에는 낮은 주택들이 드문 드문 있는 동네였다. 거의 시골 마을을 연상하게 하는 동네였다. 학교 뒷문은 매점 뒤쪽으로는 이어져 있어, 그 뒷문으로 나가면 논과 밭이 눈앞에 펼쳐지는 완전한 시골길이었다. 미술시간 야외수업에 종종 그 뒷문 쪽으로 나가 시골의 풍경을 그리고는 했다. 정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소가 밭을 갈고 있는 풍경이 재현되던 곳으로 여름이면 소똥 냄새도 바람에 실려오는 곳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고신대 영도 캠퍼스가 그쪽으로 들어선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때 아이들이 완전 시골이라 학교 가는데 논밭을 지나가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 동삼동에 1996년경 남편의 친구가 그쪽으로 이사를 했다 하여 집들이를 간 적이 있다. 그때의 동삼동은 개발이 막 시작되어 학교위쪽으로 도로와 아파트가 들어섰다. 버스노선도 새로 생겨 예전의 버스노선은 해안도로를 더 타고 들어간 안쪽의 해녀촌 앞까지 들어가 있었다. 학교 다닐 당시 참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로 오르막이 만만찮았는데 학교위쪽으로 도로가 새로 생겨 학교가 평지에 위치한 느낌이 들었다. 학교가 움직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그 동네는 개발을 하여 많은 인구가 사는 동네가 되어, 어느새 내가 모르는 동네가 되어있었다. 당시 동삼동에 땅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집이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실감을 못하다가 아파트를 직접 보고 나니 그 말이 실감 났다. 그 친구는 자신의 부모를 '졸부'라고 불렀다. "우리 집 졸부가 어제는 장롱을 바꿨어"라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친구도 이제는 하늘의 추억이 되었다. 교통사고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 지역이 발전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내가 알고 있던 그 지역의 나의 시절과 그때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만 저장된 추억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제 그곳은 내가 알던 동네가 아닌, 낯선 동네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아스라이 먼 곳이 되어버렸다. 10대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그곳의 모습이 변했다고 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학교라는 건물이 존재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장소로 하여 내 추억은 존재하던 추억이 된다. 그 주변의 산과 바다가 변하여 도시화가 된다고 해도 추억 속의 장소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참 빨리도 변하는 환경이 나의 어린 시절을 앗아간 것 같아 왠지 섭섭하다. 그 동삼동 중리 바닷가와 토요일이면 절영로를 따라 걸어 나가 동삼로와 만나는 갈림길에서 태종대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도로에서 바라본 영도의 바다와 해양대학교 입구는 나의 20세기에 존재하는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절영로를 따라 청학동 쪽으로 걸어 나가던 길에서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햇빛에 부서지던 바다는 아련하지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다. 세월 따라 지도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내 추억도 어느새 바랜 빛의 사진으로 희미해지고 있다. 기억은 뇌세포의 영향으로 나에게 유리하게 기억한다. 내가 좋았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 되는 것이 기억이다. 설사 그것이 구타의 기억일지라도. 그렇게 기억은 왜곡되는 것이다. 학창 시절이 항상 좋았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고 기억하는 것은 그 시간들이 지난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지나간 것은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래서 기억을 더듬는 여정에서 착오도 생기고 오류도 생기고 하는 것이다. 누구라고 밝힐 수 없는 독재 지도자의 자서전에서 처럼 기억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바뀌는 것이다. 자서전은 그의 기록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저장된 기억에서 꺼낸 서랍 속에는 그가 원하는 것만 존재할 뿐이다. 이미 서랍은 그가 원하는 대로 정리를 마쳤으니 말이다. 나의 기억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기억이 좋은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이 된다. 왜곡되었을지도 모르는 나의 한심한 기억을 정리하면서 여고시절의 그 학교가 있던 지리적 위치와 장소를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