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 태종대 공원 내 태종사라는 사찰에는 일심불교학생회가 있었다.
부산시 영도구에는 태종대 공원이 있고, 그 공원 내에 "태종사"라는 사찰이 있다. 1980년대의 약 3년 정도, 난 이 사찰에 속한 불교학생회의 일원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름하여 "일심불교학생회".
이 "일심불교학생회"라는 이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왠지 거리감이 있다. 일심이라는 뜻은 좋은 의미이다. '부처님의 뜻을 받드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의미라고 선배가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주먹깨나 쓰던 신체 건장한 남성들의 팔뚝에 새겨진 '一心'이라는 글자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아~~ 그렇다.
영도여자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학교 생활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아이였다. 공부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노는 것도 그렇게 열심히 놀지 않았다. 그냥 순진하게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별생각 없는 아이였다. 1학기가 시작되고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RCY에서의 활동은 신선한 재미를 주었다. 첫째 학교와 집이 아닌 곳을 갈 수 있다는 사실, 둘째 같은 학교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과 학교 공부 외의 활동들이 재미있었다. 같은 반 아이 중 RCY 활동을 하는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같은 서클(현재의 동아리 개념) 활동을 하면서 안면은 터고 지내던 아이였다. 여러 주제로 이야기하던 어느 날, 종교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RCY가 기독교 기반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이 많은 집단이다. 그러나 딱히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읽다 보니 종교에 대한 섣부른 지식들이 몇 있었고, 그런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었던지 불교학생회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RCA 활동이 종교와는 무관하게 활동하는 봉사 단체라 불교인들도 제법 있었다. 그 아이도 그랬었다.
어느 날 자신이 다니는 불교학생회에 대한 이야길 하며 토요일 방과 후인 오후에 학생회모임이 있다고 했다. 나는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항상 학교와 집만 다니는 아이였기에 망설여졌다. 그런 제안을 받고 어느 금요일 엄마에게 토요일 방과 후에 절에 갔다 오겠다고 불현듯 말을 꺼냈더니, 엄마는 약간 당황했지만 허락했다. 엄마는 대부분의 우리 세대 엄마들처럼 복을 주는 불교를 믿고 있는 기복불교신자이다. 그래서인지 사찰에 있는 학생회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어느 절이냐고 물어서 들었던 대로 태종대에 위치한 '태종사'라고 대답했고, 엄마는 차비까지 챙겨주었다. 난 그렇게 현주라는 친구를 통해 "태종사"의 '일심불교학생회'라는 모임에 참석을 했다.
토요일 방과 후, 영도여자고등학교에서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면서 도착한 태종대는 휴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초여름의 날씨로 나를 맞아주었다. 난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과 태종대 공원을 방문하였다. 버스 종점에 내려 태종대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매표소 지날 때 절에 간다고 하니 통과시켜 줬다) 잘 다듬어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광장이 나오면 좌측의 오르막길을 따라 걷다 보면 '태종사'에 도착한다.
그때의 영도여자고등학교 여름교복은 반팔의 하얀 블라우스에 하늘색 치마와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를 쓴 갈래머리였다. 당시 다른 여자고등학교는 단발머리가 주 스타일이었고, 갈래머리는 일반적으로 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스타일이었는데 유일하게 영도여자고등학교만 갈래머리 스타일 이었다.
그 여름, 교복을 입고 걸어 올라가는 두 명의 여고생의 등뒤에는 바닷바람이 간들간들 불고, 일주도로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전경이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땀이 송글 맺힐 때쯤, 태종사 입구에 도착했다. 당시 태종사 입구 건너편에는 매점이 있었다. 버스를 타면 조금 더 올라가 언덕 정상에서 내리면, 태종사 뒷길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걸어 다녔던 우리는 태종사 입구의 요사채를 지나 법당에 도착한다. 태종사에 갔던 첫날, 현주와 둘이서 걸어 올라가는 일주도로는 신선한 바람과 함께 상쾌한 느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교복 입은 학생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현주는 인사를 하면서, 궁금해하는 그들에게 나를 같은 반 친구라고 소개했다. 다들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었고, 난 그러한 일들에 아무런 의문도 없이 너무 당연한 반응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냥 나를 반겨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그 태종사의 '일심불교학생회'의 의미는 첫날, 회장이라는 선배에게 들었다. 좋은 뜻이긴 했지만 건장한 몸매의 남성들의 문신에 자주 등장하는 한자 一心 의 이미지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때에도 '뜻은 좋은데, 그래도 一心은 좀...'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나의 첫 종교활동의 시작이었다.
1980년대의 대한민국은 아직 유신정권체제하에 있었기에 학생들의 행동에도 많은 규제들이 있었다. 항상 교복을 착용하고 외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공원에 사복 입고 친구를 만나려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선도부 선생님이나 학생부 선생님들이 어느 학교 학생이냐고 물으며 단속을 했다. 선생님들끼리 이미 회의를 하고 시내의 모든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단속을 나오는 느낌이었다. 불교학생회 소속이 공원 내 사찰이라 선생님들도 아는 모양이었다. 남자 선배 몇몇은 단속 나온 선생님들과 인사를 하면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가끔은 법당 내로 들어와서 앉았다 가기도 했다. 나의 불교학생회의 시작은 태종사였지만 학년이 바뀌면서 연합회 활동을 하게 되었고, 점차 활동 반경을 넓히게 되어 중구, 서구, 동래구 쪽으로도 진출(?) 하면서 영도를 벗어나는 일들이 많아졌다. 당시의 초팔일 연등 행사는 가장 큰 행사로 학년을 시작하면서 청년회와 신도회에서 기획과 준비를 하면, 학생회에서는 재능보시를 한다. 즉, 연등을 만들고 행진에 참석하는 몸으로 하는 대부분의 일을 한다. 연등은 철사로 엮은 뼈대에 종이를 하나씩 붙이는 지난한 작업을 반복하는 단순노동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 3월의 화창한 주말을 요사채나 법회가 끝난 법당에 딸린 자그마한 공간에서 풀과 색색의 종이들과 씨름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학교를 벗어난 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주 참석하는 법회에서의 주지스님의 법문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고, 선배들이 권하는 알기 쉬운 불교서적들을 읽었다. 뜻도 모르는 경의 책장을 넘기며 따라 했고, 반야심경은 외웠다. 당시 '국기에 대한 맹세' 다음으로 외운 것이 '마야 반야바라밀다 심경, 과~안 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로 시작하는 반야심경이다. 그리고는 한글 반야심경을 접하고 그 뜻을 알았지만 경의 길이에 비해 거의 책 한 권 수준의 의미 정리를 보고는 너무 어렵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글 읽기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늘었고, 한때는 '출가를 할까'도 생각하게 되었으나 나의 결론은 '나는 속세에 살아야 되는 사람이구나.'로 끝났지만 말이다.
불교학생회의 모임이 학교와 동아리 활동 외의 나의 첫 사회생활이라고는 하지만 낯가림이 심한 나는 매주 보는 학생회 아이들과만 인사하고 지내고, 스님들과도 서먹했다. 그러니 신도들과도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 특히, 나를 불교학생회로 안내한 현주는 신도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선배들과도 친해 보였다. 그때 태종사에는 우리 또래의 수습승(?)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절에서 생활하던 동자승이었던 듯하다. 그 동자승의 배경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학생회의 남학생들 하고는 친하게 지내는 편으로 보였다.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그 동자승은 어릴 때 절에 맡겨져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학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후로 들은 이야기로는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대학을 준비하여 동국대 승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 시절,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려고 불교 관련 서적들과 불경 해석판 등등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해하려 시도했으나 10대 후반의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물론 지금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해석이 되는 교리들이 있어 살아가면서 깨치고 배우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의문들을 해결되지 못한 채 지나게 되었고, 큰스님께서는 해결되지 못한 의문은 좀 더 나이가 들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굳이 지금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될 때가 올 것이며 지금은 이런 뜻으로 풀이된다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난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이해 안 되는 걸 왜 이야기하시냐'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수줍음 많지만 성깔은 나쁜 아이로, 이해가 안 된다고 큰스님(도성스님)에게 집요하게도 질문을 했던 듯하다.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던 당시의 나는 "불자"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렇게 딱 잘라서 "불자"라고 하질 못한다. 세월이 나를 여러 종교를 접하게 만들어 그 일맥상통하는 종교의 진리라는 것을 어슴푸레 짐작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태종사의 '일심불교학생회'에서 배운 불교 교리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루는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머리 깎고 출가할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오래 생각한 끝에 난 너무 세속적이라 속세를 벗어나서 생활하면 단명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속세를 벗어나지 말고 속세에서 뒹굴며 살자."로 결론 내면서 더 이상 출가에 대한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부산의 태종대는 영도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부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동래산성과 함께 한 번쯤은 가는 유원지이다. 태종대 안에는 태종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주로 태종사에 가기 위해 10대의 주말을 방문했지만, 국민학교 때는 가족들과 함께 등대와 신선바위를 방문하였고, 공원 내에 해수풀장이 생기면서는 가족단위로 여름을 즐기기 위해 찾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타지에서 오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관광지였다. 지금의 태종대는 내가 기억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지만 부산의 관광지로 여전히 가볼 만한 곳이다. 사진으로 찾아본 태종사는 선배들과 끼니를 때우며 담소를 나누던 매점은 문을 닫았고, 본당의 마당은 탑이 들어섰다. 부처님 사리를 모신 조촐한 보궁은 이제 화려해졌고, 큰스님과 신도회 불자님들이 같이 가꾸던 텃밭은 정리가 되어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법당 앞에 조촐하던 수국도 수국축제를 할 만큼 많아져서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큰스님인 도성스님의 승복은 한국스님들과 같은 회색에 갈색 덧옷이 아니다. 평소에는 회색승복을 입지만 큰 행사에는 꼭 주황색의 승복을 챙겨 입으신다. 스님은 남방불교 즉, 근본불교의 전통을 이어 오시는 분이다. 학생회의 선배 중 빨리어 경전을 읽기 위해 빨리어를 공부하는 선배가 있었고, 불교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유학을 간 선배도 있다. 나도 빨리어 경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연유로 해서인지 보궁에 모신 부처님의 사리도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것이다. 그 사리를 모시는 행사에 참석을 했었다. 그 경건한 표정들, 그리고 보궁에 모시는 장면들, 기억이 새롭다. 도성스님은 스리랑카의 불교, 즉 남방불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계신다. 그래서 스님의 승복은 남방불교의 승복인 주황색으로,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는 스리랑카나 태국의 스님들이 입고 다니는 주황색 승복이다. 태종사는 도성스님의 지도하에 근본불교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불심 깊어 불교쪽 공부를 한 선배들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태종사는 남방불교계의 근본불교 도량"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자연스럽게 대승보다는 소승의 근본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언제인가 선배 두 분이 대승과 소승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하는 자리에 동석한 적이 있다. 당시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이 들어 인도여행을 통해 근본불교를 더 깊이 알게 되고, 같이 근무하던 스리랑카 국적의 의료진들을 통해 깊이를 더해간 불교는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소승의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리고 귀국 후 2000년 초반에 '위빠사나 수행'에 빠져 실천을 위한 노력도 잠시 했었다.
10대에 접한 종교는 거의 평생에 걸쳐 묻어난다. 불교, 한국 기독교, 미국 기독교, 영국 청교도, 몰몬교, 여호와의 왕국 및 이슬람, 힌두, 시크, 조로아스트교 등등의 교리를 알게 된 지금의 나에게 종교는 지식과 믿음을 동시에 전해주는 사상이 되어버린 느낌이지만 그래도 절에 가면 경을 외우는 마음 한쪽에서 난 아직도 불자이다. 내 10대의 불교학생회 활동이 나를 많은 생각을 하는 아이로 만들었고, 그 활동과 그 생활들이 나의 10대를 버티게 해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을 지나면서 집안이 경제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부마항쟁의 시발점과 연계되는 경제 침체가 아빠의 사업에도 영향을 미쳤고 우리 가족은 붕괴되어 흩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은 학교에 다니는 나와 동생들만 부산에 남겨 놓고 돈을 벌기 위해 귀촌을 했다. 10대의 어린이 4명이 부산에 남아 의지와 상관없는 독립을 했지만, 살림살이와는 상관없이 지내다 갑자기 밥을 해 먹고 다녀야 하는 신세는 혼돈을 가져왔다. 동생들의 끼니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하던 나에게는 힘든 일상이 되어 버렸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막내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남동생은 견디기 힘들어했고, 결국 부모님이 생활하는 시골로 내려갔다. 나와 여동생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고등학생이고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동생과 난 부산에 남게 되었다. 그 사건은 나를 반항하는 10대의 삶으로 안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은 십 대의 많은 이야기 중에 불교학생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살면서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 기억에 오래 남기도 하고, 몇 년이 기억이 없어져 버린 듯이 지나기도 한다. 나에게 불교학생회에 대한 기억은 약 2년 정도의 시간이지만 30대의 10년보다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 짧은 시간, 긴 기억에 대해 또 이야기할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