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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Jan 24. 2024

용두산 공원, 꽃시계, 가족사진

부산타워 이전의 랜드마크,

부산은 겨울에도 눈이 잘 오지 않는 따뜻한 지방에 속한다. 1970년대 어느 날 부산에도 눈이 왔었다. "60년 만의 눈"이라고 테레비에서 말했던 기억이 있다. 난생처음, 눈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된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겨울에 오는 눈을 화면과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게 되어 좋았다는 기억보다 추웠다는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나갔다가 몸이 얼어 창을 통해서만 바라보았다. 그 눈을...

그래서인지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중 눈에 대한 기억은 없다.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인 부산에서 눈 쌓인 지붕의 그림을 그려 '꿈속의 풍경'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기억이 있다. 그 그림으로 상도 받았다. 그 상 받은 다음 해 봄에 우리 가족은 용두산공원의 꽃시계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며칠 뒤 사진사가 보낸 사진이 도착하여 신기해 한 기억이 있다. 


우리 가족의 사진은 아니고, 부산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부산타워는 이제 부산을 상징하는 탑으로 자리매김하여 랜드마크가 되었다. 부산타워가 위치한 용두산공원은 이름대로 '용의 머리'를 닮아서 지어졌단다. 일제시대때 신사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근처 중앙동이 19세기말 무역을 위해 설치된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20세기초의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여 그곳에 신사를 설치하여 참배를 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말이다. 

부산 중구와 서구에는 특히 일제시대의 잔해가 많이 남아있다. 부산항이 있는 중앙동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서구 쪽의 해안인 자갈치와 송도를 비롯한 광복동, 충무동, 토성동, 부민동 일대도 일본의 잔재가 많이 남은 지역이다. 해방 후에도 군사독재 시대에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은 동네이기도 했고, 부산항에서는 매일 일본을 왕래하는 페리가 있을 정도로 일본관광객도 많았고, 일본과의 수출입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일본색이 짙은 동네이기도 했다. 20세기 중 후반의 일본문화 수용이 부산을 중심으로 특히, 광복동과 남포동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에서 '가라오케'가 처음 등장한 곳도 부산의 남포동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본어를 하는 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부산항에서 부산역 쪽으로 약간 이동하면 부산역 앞의 '텍사스촌'이라 불리우던 미군병사들을 위한 거리가 존재하였다. 그 옆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성된 화교들의 거리도 있었다. 그래서 부산의 중앙동은 한국이지만 약간의 이질감을 가지는 일본색이 짙지만 미국색도 가미된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네가 되었다. 

용두산 공원은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산세 모양으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럼 용의 몸통과 용의 꼬리도 있어야 하는데, 용의 꼬리 부분이 옛 '부산시청' 자리였다고 하니 몸통은 아마도 광복동이라고 추측해 본다. 용두산 공원은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용두산'이라는 이름을 찾으면서 시민들의 공원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신사는 한쪽으로 몰려 흔적만 남았다. 그리고 잊혀진 공간이 되었다. 


용두산공원의 용조각(출처; 네이버 여행사 블로그)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세 곳이다. 그중 가장 흔하게 알고 있는 길이 광복동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이 길은 현재 올라가는 에스켈레이트가 설치되어 편리하게 오를 수 있지만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하여 내려와야 한다. 다른 길 중 하나는 중앙동 쪽에서 올라가는 계단으로 된 길이고 이 계단은 40 계단으로 유명하여 옛날 유행가에도 나오는 길로 일본인들이 떠난 자리에 전쟁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과 연결되는 길이기도 하다. 마지막 한 길이 계단 없이 오르는 언덕길로 대청동 중앙성당 쪽에서 오르는 길이다. 옛 동주여상뒷문과 연결된 길이기도 하며, 남포동의 백화점의 옥상과도 연결되어 있던 길이었다. 이 길로 오르다 보면 길옆에 형성된 가게와 사격장이 있어 삼촌들과 나들이에서는 꼭 들러 총을 쏘고 갔던 기억이 있는 길이다. 셋 중 어느 길로 가더라도 그 길이 가지는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길들이 용두산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 잡고 오르던 광복동에서의 계단길은, 학창 시절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한 칸씩 두 칸씩 오르다 보면 '용두산공원'이라 써진 커다란 돌이 나오는 계단길의 추억이 많은 길이다. 이 길은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길로 거의 용두산공원의 입구라고 소개하는 길이다. 반면 중앙동에서 오르는 길을 나는 잘 이용하지 않았지만 40 계단으로 연결되며 부산호텔과도 연결되는 길이기에 관광객들이 자주 이용하기도 하는 길이기도 하다. 광복동과 연결된 계단 길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는 계단 길이다. 이곳은 왠지 물동이를 이고 오르는 전쟁 후의 서민들의 삶의 길이라는 느낌이 강한 그런 분위기의 길로 부산항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느낌이 강한 길이다. 반면, 대청동에서 올라가는 길은 20대에 친구들과 또는 연애를 시작한 남자친구와 걷던 길이다.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은 그 길이 가지는 기억과 추억이 있다. 길은 역사와 기억을 가지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걸었던 많은 길들이 나의 기억 속에서만 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길은 나에게만 존재하는 길이 된다. 

그렇게 어느 길을 통하건 그 길 끝에는 용두산 공원의 너른 마당에 웅장하지 않고 어딘지 왜소한 그래서 일본인을 닮은(나에게는 그런 느낌이다) 용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조각상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아래 써져있는 글이 무슨 내용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가진 이 조각상에 대한 인상은 한국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형성된 한국용은 그 만이 가지는 분위기가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용은 어딘지 통통한 굵기의 몸통에 옥색으로 수염이 짧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진지한 표정의 용이다. 그런데 이 광장에 있는 용은 혀를 내밀고 있으며 콧구멍도 크다. 더욱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에 쥐고 있는 여의주이다. 난 왜 여의주를 가진 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한국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용이 아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용조각상이 있는 광장에 바로 도착하는 길이 중앙동에서 올라오는 계단 길이다. 하지만 대청동에서 오르는 언덕길과 광복동에서 오르는 계단길은 용두산공원의 유명한 '꽃시계'앞을 지나게 되어있다. 


이 용두산 공원의 꽃시계는 당시로는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 부산타워가 생기기 전과 부산타워가 생긴 후에도 용두산 공원 꽃시계는 많은 이들의 가족사진과 기념사진을 찍게 만드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찍어주던 사진사가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당시 부산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가족사진이 탄생한 꽃시계에 대한 추억들은 한 가지씩 있을 것이다. 장소가 가지는 기억 중 아름다운 기억의 한 부분인 꽃시계가 있었던 장소는 유년의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용두산 공원의 꽃시계는 그런 장소이자 공간이다. 

꽃시계는 몇 년의 간격으로 꽃의 종류와 모양이 바뀌면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갈 때마다 각기 다른 사진을 가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 방문할 때마다 사진을 찍게 만들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꽃시계를 마주하고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된다. 흑백사진 시절에는 알 수 없는 꽃의 색감이 칼라사진 시절에는 확연히 느낄 수가 있는 것이 꽃시계의 매력이다. 이 꽃시계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초침이 있는 꽃시계'라는 내용의 글을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부산에서 살았던 사람치고 용두산 공원에 한 번쯤은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어린 시절, 꽃시계 앞에서 사진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한 장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용두산 공원 꽃시계 앞에서의 사진은 추억, 그 자체로 기억된다. 

지금은 어떤 모양으로 꽃시계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부산타워가 가지는 상징성에 더하여 꽃시계의 추억은 용두산공원에 대한 추억이자 유년시절의 기억이다. 용두산 공원에는 팔각정과 이순신장군 동산도 있다. 이 이순신장군 동상은 부산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 있으며 앞으로는 꽃시계와 뒤로는 부산타워가 버티고 있는 그림을 만든다. 어린 시절 이순신장군 동상은 위엄이 있었다. 용조각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 동상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면 이순신장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각도가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내가 용조각상이 일본인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처럼 이순신장군 동상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당시에는 광장바닥에 돌이 깔려있어 걸을 때마다 돌 밟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그 광장을 뛰어다니며 나는 돌소리가 경쾌하여 마구 뛰어다녔던 기억이 있다. 태종대의 몽돌해변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약간 다른 돌 밟는 느낌. 태종대의 몽돌해변의 자갈 밟는 소리가 통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소리라면, 용두산공원의 돌 밟는 소리는 약간 날카로운 느낌의 창이 부딪힐 때 나는 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은 그냥 시멘트바닥으로 바뀌어서 아쉽지만 말이다. 



  


겨울이다. 내가 사는 이 지방에도 눈이 왔다. 추위에 떨며 기억한 용두산공원은 꽃시계와 연결된 기억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두산공원 하면 '부산타워'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나의 유년의 기억들은 "꽃시계"와 "이순신장군동상" 그리고 대청동에서 오르는 언덕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으로 같은 장소를 공유한다. 우리의 기억은 착각과 자기기만으로 구성된 하나의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친 망상(?) 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억은 항상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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