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기독병원과 왈레스기념 침례병원에서의 실습
직업인에게 있어서 직업과 연관되어 잊지 못하는 장소 하나 혹은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사람 한 명 정도는 가지고 있다. 특히 기술과 연관되는 직업으로 실습을 하였던 장소가 있는 사람이라면 기억에 오래 남아있게 마련인 실습장소가 하나는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다. 학교 실습병원이 주로 춘해병원이었지만 산부인과 실습은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일신기독병원'에서 시행했다. 1980년대의 일신기독병원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일신기독병원에서의 실습은 병원의 탈의실에서부터 의외의 충격을 주었다. 병원 근처의 가정집을 개조하여 만든 탈의실은 낯선 모습으로 다가왔다. 실습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서 일반도로를 3분 정도 걸어서 병원 현관을 통과하는 동안 아, 실습복을 입고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학생뿐 아니라 간호사 선생님들도 병원밖의 주택가를 걸어 다녔다. 당시의 실습복은 치마에 하얀색 플라스틱 관을 썼다. 그 복장으로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것이 생소했지만 그곳에서는 다들 그렇게 다니고 있었다. 큰 도로에서 안으로 들어가 있는 작은 도로는 이미 병원촌을 만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근처의 작은 가게가 병원의 캠퍼스에 포함된 매점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본 건물 현관을 나와서 별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산부인과 검진실이 나오는데, 대기홀의 앞 벽 쪽으로 진료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다. 진료실 안에는 진료침상 하나와 의사 책상 하나와 의자 둘, 진료실의 벽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양쪽의 둘이 전부이고 문과 마주 보는 의사뒤의 벽은 그냥 통로이다. 그곳으로 간호사, 학생, 조산사, 심지어 의사들이 자유롭게 왕래를 하면서 진료를 보고 있다. 필요물품은 그 통로처럼 뚫린 벽의 안쪽에 존재하여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다. 왠지 야전병원이 이런 형태일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일신기독병원은 이렇게 의외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분만실도 진료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넓은 방에 침상 하나마다 커튼 하나가 쳐진다. 대기실이자 분만실이다. 그곳에서 대기하다 분만이 시작될 징조가 보이면 커튼이 쳐지고 의사 혹은 조산사 한 명과 간호사 한 명 그리고 학생 몇 명이 커튼과 함께 산모를 둘러싼다. 그리고 분만의 과정이 진행되면 신생아실의 간호사가 신생아용 침상을 준비하고 들어온다. 필요하면 인큐베이터가 준비되어 아기를 확인하고 데려가 씻겨온다. 그리고 나오는 분비물들, 나에게 일신기독병원의 분만실은 터져 나오는 양수 냄새와 배출되는 태반에 묻은 비릿한 냄새로 기억된다. 많은 침상에 누워있던 산모들, 그리고 그 산모들의 출산 후의 처치들은 "와우" 나도 여자인데 이런~~,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분만을 하기 위해 온 분만실에는 의사와 조산사의 교육과 실습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에만 가능했던 장소였다. 그 후 난 산부인과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또 다른 실습지로 초량에 위치한 병원이 있었다. 학교실습지인 춘해병원이 외과위주의 병원이다 보니 자연히 내과 위주의 타 병원이 실습지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초량에 있던 '침례병원'이었다. "왈레스기념 침례병원"이 정식 병원명이다. 그곳에서 심장수술도 시행되어 내과 쪽으로는 당시 이름이 제법 알려진 병원이었다. 많은 당뇨병과 심장질환의 케이스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베트남 난민을 처음 만난 것도 침례병원에서 이다. 간경변으로 입원했던 흑색 피부의 배 나온 간경변 환자이자 한국인과는 다른 냄새가 나는 베트남 난민은 나에게 한국에도 난민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런 난민을 지원하는 병원에 놀랐다. 병원은 기독교 정신이다. 한국의 의학은 기독교와 함께 들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기독교가 아닌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의 실습지는 춘해병원보다는 일신기독병원과 침례병원의 기억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겠지. 졸업을 하고 한참이 지나 찾은 일신기독병원은 근처의 모든 땅들과 건물들을 인수하여 나름 반듯한 모양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지만, 침례병원은 예전의 활기가 줄어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금정구의 신축건물로 옮긴다고 했고, 일신기독병원도 신축한 새 건물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 일신병원과 침례병원은 딱 거기까지였다. 두 병원 모두 내가 실습할 당시인 1980년대 초에도 벌써 낡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렇게 전통을 자랑하던 그 건물들이 있던 초량은 병원으로 기억되는 동네이다. 앞치마가 딸린 디자인의 간호실습복에 학생을 나타내는 하얀색의 플라스틱관, 그리고 치마밑으로 스타킹 신은 발을 얌전히 올려놓은 앞트인 흰색 샌들은 당시 모든 간호학생을 대표하는 복장이다. 그런 복장을 한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닌 도로에 일신기독병원이 있다. 일신병원의 기억은 빛바랜 추억 속의 가관식 사진과 함께 외국의 한 병원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같은 기독병원이지만 또 다른 외국의 느낌을 주던 침례병원은 미국의 소도시에 존재하는 오래된 병원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약간 어두운 병원내부의 조명과 사진에 나올 것 같은 식당의 전경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시절의 추억이 묻어나던 부산 동구의 한 단면이다. 그렇게 초량과 좌천동은 내 젊은 시절의 한 귀퉁이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