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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Jan 03. 2024

서면이란?

제1캠프스는 전포동, 제2캠프스는 범냇골, 제3캠프스는 서면?

난 1988년 2월 간호대학을 졸업하면서 간호사 면허를 취득했다. 학교는 부산의 전포동에 위치했던 당시 교명은 "춘해간호전문대학"이다. 현재는 울산으로 이전하여 "춘해보건대학교"가 되었다. 당시 전포동에 위치했던 대학은 범냇골 입구의 "춘해병원"을 학교법인병원으로 두고 있었다. 실습 중에는 종종 병원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다니기도 했는데,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당시 전포동에는 성북국민학교, 동성국민학교와 동성고등학교, 덕명여중고, 그리고 '춘해간전'으로 줄여 불렀다. 간호대학이 존재하는 촌스럽지만 나름의 교육인프라(?)를 가진 곳이었다. 현재는 터널이 생겨 지도가 달라졌지만 터널이 없던 예전에는 '춘해간전'이 그 고개의 입구에 위치했다. 대학이지만 건물이 하나밖에 없고, 주위의 성북국민학교보다 규모가 작았다. 당시 간호과 하나밖에 없었기에 작은 건물에 작은 운동장이 전부였고, 학생수도 바로 앞의 덕명여중 보다 작았다. 터널이 생기기 몇 해 전 학교는 울산으로 이전을 발표했다. 학교의 덩치가 커지지 시작한 것도 있지만 터널이 생겨야 하는 도시 계획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대가 요구(?)한 결과일 것이다.


'춘해간호전문대학'은 나름 학교법인으로 실습병원이 존재했다. 규모는 작지만 기본적인 것은 구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학교법인 춘해병원'은 범냇골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위치가 예전에 있던 그 위치이다. 지금은 교통이 많이 복잡해지고, 도로가 이리저리 아래위로 생겨있어 많이 놀랐지만, 당시에는 지하철이 막 생기기 시작하여 나름 교통이 좋은 곳에 위치한 병원이었다. 병원과 학교의 운영이 어떠했는지 나는 모른다, 학생이었으니까. 학교 수업 외의 실습은 거의 대부분 학교법인병원에서 했지만 규모가 작은 병원이다 보니 실습장으로써는 부족한 점이 많아 우리는 부산의 여러 곳으로 실습을 갔다. 기본간호학실습은 학교 실습실과 법인병원에서, 신생아실과 수술실 및 응급실등 특수파트 실습도 법인병원에서 했지만, 모성간호는 당시 조산원코스로  한국에서 유명한 '일신기독병원'에서, 성인간호 파트는 침례병원과 법인병원 그리고 일부가 부산대학교병원(지금의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산캠퍼스)에서, 지역사회간호 실습은 일부의 보건소에서 시행하였다.

 

춘해병원에서의 실습은 꽤 많은 기억으로 남아있고 일부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하기도 한다. 나의 직업인으로서의 롤모델이 처음 탄생한 곳이 춘해병원 응급실이었다. 당시 춘해병원의 1층 입구옆에 존재한 응급실은 엠블런스 주차장을 앞에 두고 범냇골 사거리의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곳이었다. 마주 보는 도로를 따라 20분쯤(20대의 젊은이의 걸음으로) 계속 올라가면 전포동의 학교가 나왔다. 그리고 서면에서 오는 도로가 현대백화점을 거쳐 조방 앞으로 가는 도로와 진시장을 거쳐 일신기독병원 쪽으로 가는 도로가 지나가는 곳이자 당시에는 부산역에서 부산진역을 거쳐 서면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가끔 응급실은 전쟁터가 되기도 한다. 기억으로는 많지 않은 침상을 가진 작은 일반병원의 응급실이 미어터지는 일이 나의 실습기간 동안 있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간호사에 대한 확실한 이미지메이킹이 가능했던 사건은 인근 서면에서 있었던 교통사고로 몰려던 인파로 인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나의 매거진 '나니야와 별별사람들'의 "환타가 된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적이 있어 생략하겠다.


  당시의 간호대학은 3년제 특수전문대학으로 1년의 기초의료과정을 마치고 2학년부터 실습을 시작한다. 나는 그 3년제 대학을 몇 가지 이유로 4년을 다녔다. 입학은 84학번이지만 졸업은 85학번과 같이 한 어두운 과거(ㅋㅋ)가 있다. 그래도 면허시험은 한 번에 패스하여 합격률 90%에 속했다. 면허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단 두 가지 유형이다. 절대로 시험에 출제되지 않는 곳을 공부했거나 정말 운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어느 누구도 졸업년도에 면허시험 준비를 하지 않는 학생은 없다. 공부가 싫었던 나도 책상에 앉아 3개월을 공부했다. 물론 문제지를 끝까지 풀어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턱걸이로 합격할 수 있었다. SKY에 준하는 유명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간호사면허증' 하나로 취업은 가능하다. 일명 big Hospital로 불리는 유명병원을 제외하면 어느 병원이라도 지원할 수 있다. 당시 비행기 승무원을 배출하던 '항공학과'가 한국에 하나뿐이던 그때, 동기 중 한 명이 외국 국적의 항공사 승무원으로 취직된 경우도 있었고, 간호장교로 군대를 간 동기가 있다. 물론 둘 다 나랑 친한 동기는 아니다. 학생수가 적다 보니 안면은 있으나 실습조가 같지 않으면 친분 쌓기는 사실 힘들다. 거의 대부분 공부는 혼자 하고 실습은 같이 하다 보니 실습조 아이들과 친분 관계가 깊어진다. 1학년 초에 친한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대개 알고 지내는 사이로 끝나는 인간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학교가 전포동에 있다 보니 주 활동무대는 자연스럽게 서면이 되었다. 집이 서구에 있었던 나는 남포동과 서면, 둘 다 주 무대였지만 아무래도 서면에서의 만남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과팅'으로 불리던 한 학과의 단체 미팅도 서면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축제들과 타 대학들도 서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1980년과 1990년 초의 청년들의 핫플은 '서면'이었다. 학교에서 서면까지는 20분에 한대 있는 버스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걸어가면 서면입구가 있는 '태화백화점'이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당시의 태화백화점 건물은 서면을 상징했다. 물론 '롯데백화점'이 생기기 전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모든 약속은 태화백화점 앞 버스정류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만남이 태화백화점 정문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학교에서 태화백화점을 가는 길은 여럿 있었지만 내가 주로 다니던 길은 지금은 없어진 '전자공업고등학교'를 지나면 '서면시립도서관'이 보이는 길로 이 도서관이 보이기 시작하면 태화백화점의 꼭대기도 보였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면을 학교캠프스처럼 이용했다. 공강이 두 시간 정도 생기면 서면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거나 볼일을 보고 시간 맞춰 버스 타고 학교로 오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물론 가난한 나는 도시락이나 근처 분식점에서 끼니를 때웠지만 말이다.


학교 근처에는 몇 개의 식당들이 있었다. 학교는 오르막에 위치하였고, 근처에 초중고가 존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식집 몇 개와 만화방이 있었다. 당시의 만화방은 시간 때우기 좋은 곳이었다. 학교 쪽의 거리를 타고 약간 내려오면 만화방 옆에 미장원이 있었다. 당시 친구가 파마를 한다고 같이 방문한 미장원에서 '정윤희 불륜 치정 사건'에 대한 전말을 개제했던 잡지를 읽으며 기다렸던 기억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밝지 않은 미장원의 실내에 파마약 냄새와 함께 소파에 앉아 읽었던 기사에서 예쁘지만 슬픈 눈의 정윤희 사진과 함께 철창 앞에서 고개 숙인 사진이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잡지의 내용을 읽으면서 사람 사는 것이 공평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공평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어려운 시련을 겪는 것이 세상사인 것만 같았다. 내가 자초했던 환경이 그렇듯, 아님 운명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어려운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는 있어도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보면 다 마음에서 빗어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정심(바른 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연관인지는 몰라도 그때의 기억은 아마도 내가 처음 세상이치가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자각한 때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때의 그 기사와 그 사진, 그 장소를 아직도 기억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미장원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분식집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시장으로 연결되는 골목 입구에 참기름집이 있었다. 전포고개로 올라가는 버스 노선이 아닌 경우에는 보통 동성고등학교 사거리에서 내리는데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덕명여중고 정문 못 가서 국화빵장수가 있었다. 리어카에 빵틀을 장착하여 꽃모양의 국화빵이나 물고기모양의 붕어빵을 팔았다. 싸게 끼니를 해결하는 방편인 국화빵은 물고기모양의 붕어빵과는 다른 맛이다. 사람들은 '풀빵'이라고도 불렀는데 아마도 밀가루를 물에 풀어 끓인 풀죽과 비슷한 맛 때문에 생긴 이름이 아닐까 한다.


2학년 때 시장 안쪽에서 같은 동아리 후배가 자취를 하고 있었다. 철원이 본가인 그녀는 어떻게 부산까지 유학을 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자취방은 내가 자주 애용하던 아지트이자 공간이 되었다. 선배지만 가진 것은 이상한 배짱과 터무니없는 희망밖에 없고, 머리속에는 간호학의 지식보다 문학과 철학 그리고 똥고집 같은 예술이 가득 차있던 나에게 그녀는 기댈 수 있는 그리고 나를 받아주는 친구이자 후배였다. '창술극회'라는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던 나는 당시의 기인들이 한다는 행동들을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밴드활동을 하던 '들국화'의멤버들이었고 외국의 보헤미언과 집시들이었다. 그런 이유들이 나를 미국보다는 유럽을 선호하게 했다. 미국은 유일하게 '엘비스프레슬리'라는 가수 때문에 좋아했다.


1980년대의 서면은 젊은이들의 장소였다.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 장소이다. 그때의 서면에 DJ가 있는 음악다방과 함께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입장요금을 받고 음료가 하나 제공되는 음악감상실은 스피커가 빵빵하여 베이스까지 들리는 사운드가 웅장하여 록음악 연주는 정말 끝내주는 곳이다. 주말에는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경연도 열려 그곳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남포동에 위치했던 '무아'가 제일 유명했고, 서면에는 상호명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르네상스와 비슷한 이름이었던 듯하다. 음악다방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미팅을 하기 위해 이용했던 음악다방도 나름의 추억이 있고, 술을 좋아하던 시절의 선후배들의 장소는 학사주점이었다. 주로 부산대학교 근처에 많기는 했지만 지리적으로 멀어서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다. 학교에서의 행사가 끝나면 뒷풀이로 자주 이용했던 고고장, 나이트클럽도 서면에는 많았다. 그중 '백악관'이라는 건물은 아직도 회자되곤 한다. 총 3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1층은 어린 젊은이를 위한 고고장, 2층은 조금 나이 든 젊은이를 위한 나이트클럽, 3층은 돈벌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이트클럽이었다. 대학 때는 1층에서, 졸업 후에는 2층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3층에 진출해야 할 무렵 부산을 떠나와서 아직 3층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백악관이 지금은 많이 변한 분위기로 검색이 된다.

서면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서면시장의 손칼국수와 돼지국밥이다. 남포동의 먹자골목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지만 젊은 청년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감안하면 꽤 괜찮은 가격들로 형성이 된 서면시장의 먹자골목은 서면에서의 젊은이들의 배를 채우던 곳이다.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부산이지만 서면의 칼국수, 특히 손칼국수는 푸짐한 양과 진한 국물이 따뜻하게 속을 채워주어 든든하였다. 시장 건물로 들어서면 쭉 깔린 장의자와 육수냄새로 따뜻함이 느껴지던 풍경은 아직도 정겹다. 지금은 아마도 재단장을 한 걸로 안다.


구글에서 가져온 서면시장 손칼국수집들



서면은 항상 1980년대 20대 풋풋한 나의 대학시절을 함께한 기억의 장소이다. 그리고 1990년 후반의 서면은 또 다른 내 삶의 기억 한편에 존재하는 작은 장소이다. 그래서 가끔 둘의 기억이 겹쳐져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보낸 부산의 기억들은 가끔 혼동과 혼합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추억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기억이어야만 한다. 추억 자체로서는 추진의 힘은 없지만 추억을 기반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추억이 제 값어치를 하는 것이다. 나의 미래는 내가 가진 추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미래여야만 나에게 가치가 있다. 내 추억이 아닌 다른 이의 추억은 나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오늘도 나는 부산을 추억한다. 내일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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