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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Jan 10. 2024

1987년, 간호사 면허와 민주화를 위한 실습?

1987년, 우린 실습과 시위, 그리고 면허시험을 준비했다.

우리 역사에서 1987년, 그해 여름은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뜨거운 사건이 있었다. 일명 6월 항쟁. 젊은이들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났다. 


그해는 나는 졸업반이었다. 간호과의 졸업반이라는 의미는 간호사면허 국가고시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수험생 모드가 시작되는 것이다. 어렵지는 않다고 하지만 시험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특히 면허가 걸린 시험은 까다롭다. 1학기에 병원실습을 마무리하면, 2학기에는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에 돌입한다. 학교에서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공부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면허증 하나에 나의 직업이 달렸기 때문이다. 2학년까지 실컷 놀았던 아이들도 3학년에 들어서면 면허시험의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대형병원의 모집공고가 게시판에 부착되기 시작되는 9월에는 면허증이 갑자기 가슴속에서 팔랑거리기 시작한다. 누가 등 떠밀지도 않았는데, 면허시험에 대한 정보가 주위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는 모의고사 스케줄을 잡고, 출제경향 분석도 한다. 그러면, 이제야 실감하는 수험생이 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료계 면허시험에 목메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20세기, 우리의 대학시절은 꿈과 낭만이 남아있었다. 난 창술극회라는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엉뚱하게 공부보다 동아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보냈다. 타 학교와 연합한 연극 동아리에서도 활동을 했고, 그때 신생이던 경남전문대 연극영화과 아이들과도 어울리며 극단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선배 따라 품바공연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당시 조방 앞에 위치했던 시민회관에서 열리던 몇 개의 공연에 뒷무대를 담당하거나 무대 담당자들을 도우기도 하면서 타학교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다. 그때 알고 지내던 지산전문대학의 연극부 친구 하나는 나중에 졸업하고 전공을 팽개치고(그 아이는 아마도 방사선과였던 것 같다) MBC 부산총국에 입사를 했다.   

극단을 기웃거리며 선배 따라 참석한 무대의 공연이 끝나면 으레 베풀어지는 뒤풀이도 곧장 따라다녔다. 연극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며 깊어가는 밤이 짧게 느껴지기도 하던 때였다. 이야기가 통하고 마음 맞는 아이들이 모이게 되면, 해운대나 광안리 바닷가에서 깡소주에 쥐포 하나로 청춘과 연극에 대한 토론에 밤을 보내고 해돋이를 보기도 했다. 가끔은 9시 첫 수업에 술이 덜 깬 얼굴로 출석했다가 "000, 너 나가"라는 교수님의 말에 히죽 웃으며 동아리방으로 향했던 기억도 있다. 

  시멘트 냄새 가득한 동아리방에서 대본 연습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와 철학에 대한 이야기, 미래의 우리들, 현시대의 모순,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예술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했다. 학교는 그렇게 나랑 친해지는 장소가 되었지만 '공부'라는 명사는 나와 연결되지 못한 상태로 졸업반이 되었다. 졸업반은 '면허시험'이라는 확실한 명사가 지배하는 학년으로 실습과 수업이 병행되는 1학기 동안 전포동(학교가 있는 동네)과 범냇골(학교병원이 있는 곳)을 왕복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 와중에도 조방 앞에 있던 시민회관과 중앙동의 소극장과 대신동의 새로 생긴 극단들을 기웃거리며 보낸 시간들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1학기로 추억하게 된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의 시간들은 그런 꿈과 낭만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와 수업이라는 현실과 생활이라는 상황에서 필요한 '돈'이라는 것에 여러 번 자존심 구기는 일들이 생기고, 그때마다 이런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위의 이야기들에 솔깃해져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에 대해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에 혹하는 시간들이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같은 과 친구 중, 어머니가 동래구 어느 시장에서 치킨집을 하던 아이가 있었다. 가게에 딸린 작은방에서 나에게 이데올로기와 주체사상에 대한 이념들을 열심히 설명하던, 그래서 내가 이데올로기와 시위의 정당성에 대한 이해하게 만든 그녀는 그해 5월부터 시작된 시위에 열심히 참석하였고, 시위의 현실성과 필요성에 대해 침 튀기며 이야기했다. 그런 그녀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졸업반이 되었기에 열심히 공부도 겸하였다. 만사에 열심히 임했던 그녀는 간호사 면허에 합격하였고 졸업 후 서울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취업을 하였다. 그 정도까지는 현실과 이상을 병행해야 하는 우리 세대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축하하며 서로 잘되길 빌었다. 그렇게 세월이 10년 정도 지난 후 들린 소문은 그녀가 미국으로 이민 갔단다. 그렇게도 "미제타도"를 외치며 자본주의의 모순과 민주주의의 부활과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외치며 한국을 그렇게 아끼던 그녀가 미국으로 갔다고?, 난 처음 그 소문에 "에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고 그 사실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통해 듣고는 그만 입을 닫았다. 그래, 그런게 인생이지. 인생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고, 내가 설계한 대로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니야. 또한 내 생각이 살면서 바뀌기도 하는게 인생이야. 그녀의 20대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그렇게 그녀의 생각과 사상에 영향을 미치며 결정을 하게 되었겠지, 내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선택했던 것처럼, 그녀도 선택을 해야 했겠지. 그런게 인생이야. 


1987년, 당시는 턱도 없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좌익이라는 플레임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우익이라는 플레임을 씌우던 사회에 반항하는 의미로 '무정부주의'에 대한 동경을 갖고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까를 고민하는 20대의 무리와 대한민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직업관과 지극히 현실적인 경제관념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20대의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물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에서 갈팡이는 젊은이도 있었지만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표현하지 못했던 사회적인 분위기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생활을 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나 자신을 위한 하나의 주머니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색이어야만 한다고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초록은 동색'이란 표현이 정말 실감하던 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별 특별한 생각과 생각이 없었던 나는 소극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않게 이런저런 색들을 관찰하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는 무지개색의 인생을 꿈꾸며 모든 색을 포옹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1987년은 시작되었고, 사회적으로 젊은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당시론 정확한 의미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젊음이라는 무기 하나로 생각하고 생활하고 행동하는 20대였다. 그리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 되어버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해도 시대에 뒤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의료계 대학생들도 그 시대적 상황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렇게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회 임원들은 협박과 회유를 동원한 교수님들의 염려를 뒤로하고 그 작은 학교의 운동장에서 출정식도 했다. 교수님들도 그렇게 해선 안된다는 쪽과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학생들을 해체시키지도 지지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두 편으로 나뉘어진 교수진들도 의료계의 선배들 답게(?) 정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존경한다. 애매하지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는 의료계 선배들의 행동은 아마도 세습되는 것인가 보다(ㅋㅋㅋ).  


그렇게 병원실습이 한창일 1987년 5월에 전국 대학생연합에서 뭔가 시작되었다. 당시 학생회와는 전혀 인연이 없던 나에게도 서울의 데모이야기가 들리면서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그때는 전국적인 민주화의 운동으로 그 시절의 20대들은 시위를 하거나, 시위를 진압하거나 둘 중 하나를 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도시에서 시위는 산발적 또는 동시적으로 진행되었고, 모든 시민들이 동참하는 시민운동이 되어버렸다. 그 많은 날들 중에도 우린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병원으로 출근을 했고, 학과 공부와 병원 실습 그리고 시위를 했다.

학생회장은 모임 장소와 시간, 준비물 등을 비밀스럽게 전달했고, 실습지 별로 또 조별로 전달받고 행동했다. 당시 실습을 이어가던 우리 학년도 운동장에 모여 출정식을 하고 부산역으로 출발했다. 부산역에서 모인 대규모의 젊은이들의 중간에서는 우리가 어떤 모양인지 모른다. 내 옆에는 아는 얼굴이 있고, 줄 맞춰 앉은자리에서는 그냥 학교 행사에 참여한 기분이고 분위기였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그런 자리라는 느낌으로 진행하며 서면으로 행하던 중, 부산진시장 근처에서 갑자기 분위기 싸아 해지면서 채류탄이 터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흩어졌다. 옆에 있던 남학생들이 근처의 여학생들과 숫자를 맞추어 주었고 순간적으로 "뛰어"하는 소리에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뛰었다. 나는 그냥 뛰었다. 손이 잡힌 채 그냥 마구 뛰었다. 그리고 진시장의 철물점이 있는 골목에서 상인들이 불렀다. 철물점을 지나 가게에 딸린 방을 지나 정지를 지나 뒷문으로 어느 골목을 나왔고 우린 근처의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남학생은 남탕으로 여학생은 여탕으로.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가 희끗한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고, 우리 그렇게 목욕탕에서 한 시간쯤을 보냈다. 그리고 실습시간이 다가온 나는 씻어서 샴푸냄새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오니 주인아주머니는 없고, 젊은이가 있었다.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를 하고 진시장에서 춘해병원까지 도로를 따라 걸었다. 도로는 한적했고 샴푸냄새 풍기며 걸어 나오는 나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큰길로 나가니 도로는 막혔고, 차들은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채류탄냄새는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 도로에 경찰버스와 전경들이 보였고 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실습지 병원. 당시 실습지는 '학교법인 병원'으로 우리 학교의 실습지 병원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시위 장면 중의 하나는 서면에서의 시위 때였다. 어느 날 오후, 부산역을 출발한 시위대는 범냇골을 지나 서면으로 진입했고, 난 범냇골에 위치한 병원 실습을 위해 시위의 전 과정을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면으로 진입하기 전에 범냇골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머뭇거리게 되면서도 시위대에서 빠져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경찰기동대가 진압에 들어오면서 시위대는 흩어지게 되었고, 실습지로 향하던 나도 중간에서 길이 막혔다. 그때 어느 건물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문을 열고 청년들을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근처에 있던 나도 붙잡히지 않기 위해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4층 건물의 가정집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가 한숨을 돌리며, 그 집 전화로 실습지에 시위대 때문에 늦겠다고 연락을 했다. 그 후 나갈 틈을 보려고 4층에서 내려다본 서면의 모습은 전쟁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주위의 불이 꺼진 캄캄한 거리에 방패를 든 진압대원들의 발소리가 어두운 거리를 메우고, 골목이나 건물 1층에 있던 청년들이 하나씩 붙잡히는 모습과 내려진 가게의 셔터 안으로 연막탄과 수류탄형 채류탄을 던져 넣는 진압대원들이 보였다. 열 지어 움직이는 방패든 진압대와 그 뒤를 따르는 장갑차들, 또 뒤이어 채류탄포를 장착한 탱크처럼 생긴 차량들, 그 포에서 터져 나오는 회색의 연기들, 난 그런 전쟁영화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육이오 때 북한군들이 쳐들어오던 느낌이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공포를 넘어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했다. 불 꺼진 어두운 상가 거리, 그 도로 위의 열 맞추어 움직이는 진압대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써라운드의 군화 소리, 그리고 퍼져가는 회색 연기와 비명소리. 우린 그렇게 1987년을 보냈고, 내 기억 속 1987년은 전쟁영화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한창 실습을 하던 아이들은 서면과 부산역에서 시위를 하다가도 실습시간이면 유유히 실습장에 도착하여 실습을 이어나갔다. 선배들은 제발 탈의실에서 채류탄 냄새가 안 났으면 좋겠다고 했고, 가끔은 간호학생복을 입은 우리들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로 어느 시위장에 있었는지 알아맞히는 선배들도 있었다. 그렇게 그 시대의 시위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하나의 행사처럼 되었지만, 간혹 보수적인 대선배를 만나면 일장연설을 감당해야 했다. 특히 환자의 보호자들은 마음에 드는 실습생이 그런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면 살짝 불러서 '그러지 말라'라고 염려하는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선배들과 보호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갈수록 시위의 규모는 커졌고, 진압은 공포로 다가왔다. 실습이 있는 날 시위에 참석하는 우리들의 가방에는 실습복이 생명처럼 들어있었다. 시위대를 적당히 빠져나오더라도 검문에 걸리게 되면 대학생들은 일차적으로 연행하던 시절이라 가방 속에 들어있던 학생실습복으로 우린 예외가 되기도 했다. 검문에 걸리면 가방 속의 실습복과 목적지가 어느 병원인지 이야기하면 병원에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시위대가 서면이나 범냇골 근처여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당시 나의 실습 병원은 서면을 거쳐야 갈 수 있는 위치였기에 시위대로 인하여 버스가 없어 걸어가야 한다는 핑계가 통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는 경찰서 연행이 시행되기도 하였단다. 동기 한 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교수님이 직접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실습지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1987년, 나의 대학시절은 실습과 시위, 그리고 면허증으로 대표되는 시절이었다. 



20세기의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고 행동했다. 다만 현재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그렇게 토론하고 비판하며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우린 미래의 내 자식들이 나보다 좋은 사회환경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시위에 동참하고, 채류탄 가스에 따가운 눈 비비며 콧물 풀면서, 그런 전쟁 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 우린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20세기의 한국보다는 지금이 훨씬 자유롭고 민주적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21세기의 한국은, 민주는 모르겠고 확실한 자본주의의 나라라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는 중년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선택이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내는지 체험하고 있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체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 선택은 아니라 해도, 한 명이라도 많은 다수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선택을 하게 된 현재의 대한민국 현실을 통해 우린,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인 불황을 내가 어쩌지는 못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과 함께 누군가 이야기한 "지구에서 제일 해로운 동물이 인간"에 공감한다. 인간들의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가 구성되어야 하는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난 그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평안했으면 한다. 내 삶은 나에게 소중하고, 타인들은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나는 내 인생이 어느 누구보다 소중하다. 너무 이기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나는, 10대 후반에 이미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리고 내가 없는 세상은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해 버린 사람으로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해 민주주의는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을 가진다. 다만 너무 많은 좋지 않은 상황과 좋을 것 없는 선택들에서 내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20대가 지나 성인이 된 아이들도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현재의 한국은 선택이 불러온 결과를 느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시간이 지속되고 있다. 잘못된 선택으로 쪽팔리는 국민이 되어버린 책임도 국민들이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이니까. 그것을 알게 되었으면 같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함을 알게 되고, 바꾸어야 하는 시점에서 과감히 행동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함을 알아야 한다. 내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아이들이길 바란다.

과거는 현재를 있게 한 시간들이기에, 이런 이야기에서 현실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책임이 따르지 않는 민주주의는 이미 탈을 쓴 늑대인 것이다. 



20세기의 대학생들은 지금의 대학생들과는 다른 생각으로 20대를 보낸 것은 확실하다. 시대가 다르니까. 세상의 문화가 다르니까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추억하는 20세기가 있는 것이다.


 * 대문사진은 메디포뉴스(2012-10-17)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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