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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Feb 10. 2023

from 1988 to 1989 in Riyadh

그해, 리야드 한국인 여자기숙사 이야기

  1988년 서울은 올림픽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 올림픽이 나에게는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1988년, 정확히 몇명인지 기억에 없지만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을 태운 대한항공기는 9월 어느날 저녁, 리야드 킹칼리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전부 둘러보지 못했지만, 그 당시에도 번쩍이는 대리석바닥과 조명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우아하고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인 리야드시 변방에 위치한 한국인 기숙사에 도착한 우린, 짐을 풀었다. 아득한 옛기억이고 당시의 나는 주변인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관심을 가지던 시절이라 같이 비행기를 타고 리야드에 도착한 일명 '비행기 동기'들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기숙사 도착 후 방배정을 받고, 짐을 풀고 소위 말하는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정확히 어떤 내용의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풍습과 한국인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 그리고 기숙사 생활규칙이었던 듯하다. 유일하게 기억 남는 것은 기숙사청소점검을 한달에 한번씩 한다는 이야기 였다. 기숙사에는 오로지 한국인들만 있어서 한국여자기숙사(Korea Women Dormitory)로 불렸다. 리야드시내의 여러병원에 거주하는 독신의 간호사 및 의료종사자들(간호조무사를 포함한 병원행정, 의료기사 및 영양사, 조리사 등등)은 모두 이 기숙사에 거주했다. 기숙사에는 Riyadh Central Hospital의 간호부장과 기숙사 사감선생님이 세분 계셨고, 각 병원의 간호과장, 수간호사들을 포함한 간호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아마도 4층으로된 두개의 건물로 이루어 졌다는 기억이 있다. 간호부장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중성적인 느낌 그대로 이름도 중성적인 느낌이었다. 아마도 '김병수', '김경수' 혹은 '김정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간호부장과 아득한 신참인 내가 만날 일은 기숙사에서 오며 가며 보는 것 외에는 거의 없었다. 


  우린 항상 기숙사앞에서 각 병원으로 출발하는 버스 혹은 벤(근무자 수가 적은 병원에는 8인승 벤을 운영하였다)에 올라 출근을 하고, 퇴근도 병원 주차장에서 버스 시간에 맞추어 퇴근을 했다. 점심 시간없이 8시간 근무 후 퇴근하는 버스에는 명단에 있는 사람이 다 와야 출발하였다. 내가 근무했던 Riyadh Central Hospital의 내과병동 데이근무조는 출근전 멤버들의 간식을 준비하는데, 기숙사 식당에서 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밥과 반찬을 준비해야하는 일은 언제나 근무조의 막내들이 준비했다. 막내들은 같이 근무하는 근무조 선배들의 식성을 파악하여 그녀들의 입맛에 맞는 샌드위치나 간식, 음료들을 준비하여야 했다. 그래서 항상 아침을 챙겨먹을 수 밖에 없었고, 만약 챙기지 못하면 그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서 근무해야 했다. 그런날은 근무내내 등이 따갑고 마음이 많이 불편하여 알람을 꼭 맞추었고, 심지어 잠을 자지 않고 출근준비를 하고 퇴근해서 자는 한이 있어도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퇴근 후에는 기숙사식당에서 언제든지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 배가 고프면 저녁을 일찍 먹기도 했다. 기숙사 식당에 영양사는 없었지만 사감선생님들이 식단을 짰고, 한국인 조리사가 근무하고 있어서 식사는 주로 한식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조리사들 중  필리핀인과 인도인 몇이 출퇴근을 한 것으로 기억난다. 그 중 한 필리피나가 나에게 김치 만드는 방식이 비 위생적이니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녀는 아마도 기침냄새가 싫었던 듯하다. 기숙사에서는 김장도 했다고 기억한다. 내가 직접한 것은 아니지만, 조리사들과 사감선생님들이 주도하여 김장을 년2~3회 정도 한다고 들었고, 고추장 된장 간장들도 한국식품상회를 통해서 제공한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한식을 많이 먹어 음식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다. 

  기숙사에서의 외출은 버스로 움직이는 쇼핑타임이 거의 전부였다. 쇼핑타임과 장소가 공지되면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적어 신청하고, 날짜와 시간에 맞춰 준비하여 버스에 올라타면 쇼핑장소로 데려다 주었다. 쇼핑시간은 보통 2시간 정도가 주어졌다. 그 시간동안 쇼핑하고, 구경하고, 간간히 연애도 하는 선배들의 노하우는 대단했다. 나도 간간히 데이트하는 선배를 대신하여 쇼핑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나 또한 팔레스타인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데이트를 했고, 내가 남자친구 사귀는지 알고있는 선배들이 대신 쇼핑해주는 일도 있었다. 쇼핑외 일년에 두번 정도 소풍을 갔다. 소풍은 근처 놀이 공원이나 유적지 위주로 움직였고, 여자들의 이용시간에 이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변했는지 모르지만 중동의 특성상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에서 모르는 남자와 여자는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으므로 공원이나 기타 공공장소에는 어린이와 여자가 이용하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월수금일은 남자, 화목토는 여자와 아이들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쇼핑센터는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지만 외국인들도 예외없이 여자이면 '아바야'를 갖추어 입어야 했다. 얼굴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손과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위의 피부가 노출되지 않게 의복위에 검은색의 아바야를 입고 검은색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다 가려야 외출이 가능했다. 그래서 신참들은 선배에게 부탁해서 '아바야'를 구입하거나 물려받아서 착용해야 했다. 쇼핑장소는 매주 달라지는데 매월 한번은 골드마켓이 있는 리야드 시내의 쇼핑거리로 갔다. 그곳에는 금융권도 포함되어있는 거리로 은행일을 보거나 금붙이들과 옷, 신발들을 구입했고 그외는 청과시장, 마트,  큰 쇼핑센터등으로 가서 여러가지 생필품들이나 간식거리 및 필요물품들을 구입했다. 청과시장의 과일들은 싱싱했으며 달고 맛있는 열대과일들도 많아 친한 선후배들이 공동으로 과일을 구입해 나누어 먹기도 하고, 야채들을 구입하여 입맛에 맞는 무침이나 요리들을 해 먹기도 했으며, 시내에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계가 몇 있어 그 곳에서 한국라면을 구입하여 친한 사람들이나 룸메이트와 함께 라면파티를 열기도 했다. 

  우린 거의 한달이 지나고 나서 방배치를 다시 하게되었다. 첫 한달은 비행기 동기들끼리 한방에서 생활을 했다. 난 6인이 거주하는 방에서 비행기 동기들과 함께했다. 우린 각자의 근무병원이 달랐고, 근무시간도 달랐다.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위해 각자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여 피해를 주지 않으려했지만 내 방짝들은 아마도 나 때문에 불편했었나 보다. 한달 후 방을 재배정하게 되었다. 신참인 나는 감히 1인실은 원하지 못했다. 1인실은 수간호사급 이상들만 배정 가능하였기에 신참인 우리들은 2인실이 제일 좋은 배정이었다. 나도 2인실이 되기를 빌었고, 2인실로 배정을 받았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발표되던 날 방 구경을 갔다. 그 방은 1인실 하나, 2인실 2개와 화장실 및 샤워실 하나, 거실 하나로 이루어진 빌라형이었다. 배정받은 2인실은 타 병원 수간호사 옆방이었지만 조용한 성격의 수간호사는 시끄러운 나를 참아주었던 것같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도 주의 한 번 주지 않았다. 내 방짝은 8월에 도착한 한달 선배였지만 동갑으로 성격이 순하여 배려를 많이 해주어 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기가 쎈 편이라고 간부들이 판단했던 듯하다. 몇개월 지나 전해들은 소문에 다른 동기들이 불편하다고 해서라는 이야기랑, 선배들이 나를 예뻐해서 2인실로 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러면 어떠냐 2인실에서 잘지냈다는 것이 중요하지. ^^. 난 방짝의 많은 배려 덕분에 방에서 향도 피우고 불경도 외우며, 삼배도 하는 등의 종교활동과 베토벤을 비롯한 챠이코프스키, 바흐, 헨델등등의 웅장한 교향곡들을 스피커 울리도록 켜놓고 들었다. 대구 출신인 방짝의 폭신한 얼굴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아마도 인복은 있었나 보다. 

  한달 한번 시행하는 청소점검은 주로 오후에 시행하여 저녁번이라도 청소를 하고 출근을 해야 했다. 빌라내에서 순번을 정하여 청소를 시행하고 점검이 끝날때까지 사용을 자제시켰다. 그래서인지 1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의 상태는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하였다. 기숙사 로비의 대리석 바닥은 항상 윤이 나서 로비를 통해 출근할때나 퇴근하여 로비를 들어서면 잘 유지된 건물 상태가 기분이 좋게 하였다. 특히 쇼핑을 위해 버스를 기다릴때는 쇼핑에 들떠 있을때나 쇼핑목록을 정리 하면서도 바닥이 예쁘고, 천장도 너무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건물이 깔끔하고 깨끗해서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방짝이나 친한 선배들의 기억이 많다. 여행에서 좋은 기억들은 좋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나도 1988년 리야드에서의 기억은 좋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특히 나를 예뻐해서 연애사를 공유했던 선배들, 사우디에서의 생활과 아랍인들에 대한 여러 이약기를 해 주었던 선배들, 본인의 여행담과 유학준비를 알려주었던 선배들, 빠른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스타디를 했던 비행기 동기들, 같이 라면과 밥을 먹으며 어려움을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 생일날 선배를 통해 한국인 가계에서 마련한 밀주(집에서 만든 막걸리)를 먹고 열나고 간수치 올라 병가받았던 기억들, 늦은 저녁이면 전화기 붙잡고 안되는 영어와 아라빅을 섞어 말하며 연애전화를 했던 기억들이 정겹게 떠오른다. 

  리야드에서 두번의 소풍이 있었다. 첫번째는 사우디아라비아 입성기념으로 Old Riyadh와 디리야의 궁전에 갔다. Old Riyadh는 사막의 모래와 같은 색의 전통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정말 모래의 나라, 사막의 나라 한 가운데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표지 사진에서와 같은 색이지만 표지 사진은 아마도 관공서인 듯하다, 사우디 국기가 보이는 걸보니. 다음으로 도착한 Diriya는 옛리야드의 궁전터라고 했다. 정말, 아랍왕족이 살았던 궁전으로 아라비아배경의 영화에 나올듯 한 풍경과 정원이 예쁜 곳이었다. 공개된 곳의 내부만 볼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진 궁전의 내부 회랑의 분수는 너무 예뻤고, 잘 가꾼 정원이 모래색의 벽과 아치형의 지붕이 잘 어울러져 10대에 본 만화책 "아르미아의 네딸들"에 나오는 배경 그림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두번째의 소품은 한국의 놀이동산 같은 곳으로 놀이기구가 갖추어진 공원이었다. 우린 여자들과 아이들이 입장하는 날에 '아바야' 착용없이 입장을 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며 비디오 촬영도 하였다. 당시 선배 중 비싼 기기들을 갖추고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고, 놀러간다는 생각에 비디오 촬영을 하여 나중에 같이 보자고 동기들끼리 의견 투합하여 선배에게 빌렸다. 여기 저기 동영상을 촬영을 하던 중, 같이 입장한 사우디여자가 빠른 아랍어로 뭔가를 말했고 우린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제재를 받고 필름을 뺏길 위험에 처했다. 임기웅변으로 배터리를 넘겨주고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호부장에게 민원이 들어가 그런 공공장소에서 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영어로 작성하였다. 그녀가 한 민원내용은 사우디인들인 자신들을 촬영한 줄로 알고 큰 소리로 자신들은 촬영하지 말라고 했단다.  

  난 리야드에서 1988년과 1989년을 보냈다. 일년을 보낸 리야드에서의 기억은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공존한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중동권의 나라의 수도인 리야드에서 보낸 일년은 많은 기억들이 각인되어있다, 마치 사진처럼 많은 장면들이 한 컷씩 지나간다. Old Riyadh의 황량한 모래바람, 아바야 자락 휘날리며 걸었던 거리들, 카트 밀면서 다닌 넓은 거대한 마트 및 쇼핑센터, 수박값을 흥정하던 과일시장, 금붙이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골드마켓 등등. 사진은 한장씩 각인되어 나의 기억속에서 어린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지나간다. '지난것은 모두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당시 1년을 지나고 계약서의 Finish sign을 하면서 아쉬움도 남았다. 그런 아쉬움에 Riyadh를 떠났고, Buraydah를 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기억해내는 30년이 훌쩍 지난 그때의 기억은 나를 미소짓게 한다. 물론 기억이란 잘못될 수도 있고, 왜곡될 수도 있고, 나를 합리화해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 기억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어떠냐, 내 기억인데. 내가 기억하고 싶은 과거만 기억한다 해도 난, 좋다. 내 기억이니 내 마음인 것이다. 과거도 그랬지만 지금도 난,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으로 나에게만 많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이 가장 좋다. 나의 기억을 내가 원하는 이 시간에 끄집어 내어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 나중에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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