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은 대한민국 국토의 아우트라인을 바꾸었다.
부산에는 아미산이 있고, 아미산 아래 아미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기억에도 없는 삼천포에서 태어난 나는 아미산 아래 산동네인 아미동에서 뛰어놀던 유년의 기억이 있다.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나와 친했다는 여자 아이와 집 뒷산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낸 유년의 기억은 조각처럼 남았다. 그 조각 중 하나에는 숨바꼭질을 하다 이웃집 돌담의 삐죽 튀어나온 돌(비석이었을 것이다)에 무릎이 쓸려 뼈가 보이는 상처로 동네 의원에서 5바늘을 꿰매는 큰 시술을 한 기억이 있다. 그때 본 하얀색의 내 뼈는 아직도 생생한 흰색으로 기억의 한 부분에 남아있다. 그때의 흉터는 내 왼쪽 무릎에서 나와 같이 성장하여 존재감을 뽐내며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런 아미동에서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도의 대교동으로 이사를 하여 영도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 영도는 나의 학창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엄마는 대교동의 차가 다니는 어느 좁은 도로변의 한 집에 미용실을 차렸다. 두 살 터울의 세 동생과 나, 그리고 엄마와 아빠 다섯 식구가 미용실옆에 딸린 살림집에서, 영도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영도에서의 기억은 동네의 또래 아이들과 집 밖에서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돌공기놀이 등등을 하던 기억과 엄마의 미용실에서 흑백 테레비를 보았던 기억이 거의 전부이다.
그 시절의 어린 학생들은 학교외에서는 공부하지 않았고, 거의 밖에서 뛰어 놀았다. 학교에 입학하여 한글을 배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때라 선행학습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던 때였고, 아주 부잣집 아이들만 '유치원'이라는 곳을 다녔다. 그래도 나는 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어떻게 배웠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입학 전 버스를 타고가다 간판의 글씨를 읽어 엄마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희미한 내 기억으로는 아미동의 이웃에 학교 다니는 언니가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학교놀이를 했다. 당시의 학교놀이는 언니들이 동생들에게 한글과 숫자를 가르키는 교육의 장이자 학교의 생활에 대해 미리 체험하게 해주는 체험놀이 같은 것이었다. 동네의 그 언니가 선생님으로 흙바닥에 'ㄱ,ㄴ, ㅏ, ㅓ'등을 써 놓고 우리더러 읽는 법을 알려주었고, '1+1=2' 이런 숫자들도 알게해 주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한글을 깨쳐 간판의 글씨들을 읽을 수 있게되면서, 그때부터 난 똑똑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그 언니가 보이지 않게 된 후로는 내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 언니처럼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을 하면서 놀았다.
7살에 학교에 보내진 나는 한글만 읽을 줄 알았지 학업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아 산수를 못해 학교에 남아 구구단을 외웠다. 그때 나의 학습능력으로 인하여 2학년을 한번 더 다녀야 하는지 엄마 아빠는 심각하게 의논을 했었다. 그 시절 구구단은 2학년 산수 과목이었고 엄마는 학년을 한번 더하는 것은 어린 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너는 똑똑하니까 따라갈 수 있지?"라고 했고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지만 그냥 그대로 다른 아이들과 같이 학년을 따라 올라갔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산수를 못한다. 더하기 빼기를 포함한 사칙연산이 나에게는 참 힘들고, 숫자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뒤처져 숫자와 관계된 것들은 자신이 없다.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로 돈 계산도 암산보다는 계산기를 사용하는 것이 빠르고 쉽다.
그 초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흑백테레비에서 본 육영숙여사의 죽음과 생중계로 진행된 국장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미용실의 선풍기 앞에서 광복절 행사를 테레비로 보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이리저리 움직였고 아나운서는 영부인이 총상으로 실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국장이 진행되는 상황이 흑백테레비로 생중계가 되어 참으로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국화꽃으로 장식된 관의 앞 뒤에서 걸어가는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에 흑백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저게 뭔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여자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그때의 영부인은 여자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 나도, 엄마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돌아가신 영부인을 닮은 여자아이가 가끔 화면에 얼굴을 비췄다. 그렇게 박근혜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집 방안에도 흑백테레비가 생겼다. 미장원에 있던 작은 것이 아니라 미닫이 주름문이 달린 상자 안에 들어앉은 흑백테레비였다. 저녁이면 둘러앉아 아톰과 파란해골 13호, 마라치 아라치를 보면서 신나 했다. 동생들과 난 파란보자기, 빨간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이불더미에서 뛰어내리며 방안을 누비고 놀았다. 그 시절의 흑백테레비는 기쁨이었고, 놀이였다.
그리고 몇 년이 더 지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의 전파사 앞에서 칼라 텔레비전을 처음 보고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화면 조정시간에 나오는 색동의 색깔들에 나는 넋을 놓고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칼라텔레비전이 나올 때쯤에는 엄마가 미용실을 그만두고 아빠가 사업을 시작했고 우리는 아파트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에 이사를 간 후로는 그때 시행하던 내 집 앞 쓸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 참 기뻐했다.
1970년대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것이 한창이었던 시절로 여러 가지 행사(?)에 학생들이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날짜를 정하여 내 집 앞 쓸기, 학교 청소하기, 쥐 잡기 운동, 잡곡밥 먹기 운동 등등을 하였다. 내 집 앞 쓸기는 매일 아침, 눈 비비고 일어나 빗자루에 쓰레받기를 준비하여 집 앞을 쓸었다. 항상 어디까지가 비질을 해야 하는지, 내 집 앞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하며 내린 나의 결론은 '내 빗자루가 닫는 곳이 내 땅이다'라는 생각으로 도로까지 쓸었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남의 집 앞은 쓸지 않고 누구의 땅도 아닌 것 같은 도로에 욕심을 냈다. 청소는 집에서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시행되었다. 매일 수업 후 종례하기 전 교실을 청소했고, 각자 배정받은 구역을 깨끗이 쓸고 닦았으며 심지어 걸레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청소를 했다. 복도 청소에 걸리면 일주일에 한 번, 왁스칠하는 날이면 왁스 묻힌 걸레를 발로 밀고 다니며, 소위 걸레를 타고 다니며 청소를 했었다. 난 그 많은 여러 운동 중 '쥐 잡기 운동'이 정말 싫었다. 쥐를 잡아 꼬리를 잘라서 학교에 제출했던 그런 운동!! 그 쥐를 잡기 위해 연탄집게를 생물에게 내리치면 그 연탄집게를 타고 전해지는 둔탁한 느낌이 지금도 머리를 쭈뼛 세우게 한다. 그래서 항상 삼촌이나 친척 오빠들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대변검사하는 날이다. 채변 봉투를 받아 들고 대변을 담아 제출했고, 그 결과 회충약을 먹어야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인상을 쓰게 한다. 그렇게 기억만으로도 벅차고(?) 많은 행사들이 1970년의 10대에 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런 행사 중 하나로, 시 단위나 국가 단위의 행사에 마스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수업대신 연습을 하고 전국단위의 행사에 불려 나가 종합운동장에서 같은 색의 운동복에 같은 종류의 신발을 신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해마다 학교에서는 운동회를 개최하여 학년별로 각 나라의 민속춤이나 한국춤, 마스게임등을 하며 흙먼지 날리며 뒹굴기도 했다. 그런 초등학교 생활이 중학교로도 그대로 이어져 중학교에서도 운동회라는 것을 했고, 전체 학년을 두 팀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체육 경기를 하고, 팀을 응원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 시절의 구호는 "체력이 국력이다"였고 학교에선 그 구호 아래 체력을 키우려고 온갖 운동을 시켰다.
고등학교에서는 입시라는 것에 가려지기는 했어도 학생들이 공부만 하면 체력이 떨어진다고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 모여 체육선생님이나 무용선생님의 시범하에 국민체조를 했다. 그 국민체조를 하고는 점심을 먹고 다시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다. 공도 차고, 산책도 하고, 매점도 가고, 심지어는 학교를 빠져나가 해변가 또는 숲길을 걸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주택가에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바다가 보이는 숲 속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자갈이 깔린 해변을 거닐거나 학교뒤 숲 속을 거닐기도 했고, 아래에 위치한 남고의 아이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런 산책 시간에 아는 척하는 많은 남학생들이 초등학교 동창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쟁이라는 공포와 '공산당'이라는 북한이 우리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반공교육이 강화된 상태로 청년들을 전쟁의 자원으로 준비시키는 교육도 존재했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등학교에 존재하는 학도호국단이라는 제도였다. 교련이라는 수업시간을 만들어 군사훈련을 시켰고, 여학생들은 간호군으로서의 준비를 위해 여러 가지 응급처치를 배워야 했다. 그 시절의 교련 선생님은 간호장교들이 대부분으로 교육을 위해 학교로 부임하여 군사훈련도 같이 병행하였다.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색 구급가방을 어깨에서 허리쪽으로 어긋나게 매고 교련복을 입고 열심히도 붕대법을 실습하였고, 군사이론도 배웠다. 특히 학도호국단은 군대식으로 운영이 되어 학생회장이 자동적으로 학도호국단의 단장이 되었고, 학생회 간부들은 호국단의 각종 직책을 맡아서 운영되었다. 그때는 군사정권시대였으며 한국은 아직 전쟁 중이었다.
교련이라는 과목을 통해 남학생들은 총검술을 비롯한 사열을, 여학생들은 붕대법을 비롯한 응급처치법을 배워, 연중 행사로 시단위의 각 학교끼리 모여 시범을 보이는 행사를 했다. 무슨 국군의 날 행사처럼 웅장하고 질서 정열하게 시행했으며, 그 행사를 위해 몇 개월을 운동장 땡볕에서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련선생님도 간호장교 출신으로 아이들을 군인 대하듯이 하였고, 교련 실습시간에 잘 따라오지 못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이 보이면 얼차례도 서슴지 않아 운동장 두 서너 바퀴 도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때는 생리통이 있는 친구들이 정말 부럽기 조차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체력은 국력이다"는 나의 청년기까지 이어져 젊은 날의 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아직 휴전 중인 상태이다. 그러나 1970년대처럼은 아니다. 그때는 북한이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나라였으니, 우린 경제성장과 군사훈련을 동시에 하여야 했다. 지금의 군대는 현대화된 군대이다. 우리의 삼촌들은 건물도 없는 막사에서 군대생활을 했다고 한다. 나의 막내 삼촌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첨전용사이다. 그리고 막내 외삼촌은 군대에서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 외가 친척들이 "군인목숨은 갯값보다 못하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 시절은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의 우스갯소리로 '청소년 1명, 성인 1명, 군인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참으로 고단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1970년대는 새마을 운동과 함께 대한민국이 성장을 위한 기초를 닦고 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절의 10대는 우울과 희망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였고, 개천의 용이 되는 마지막 시대였다.
새마을 운동은 전국에서 시행되는 사업이 되어 도시와 시골을 망라하고 전국적으로 대한민국의 생활터전을 잡기 위한 국토의 아우트라인을 바꾸는 운동이었다. 당시 시골의 모습은 2~3년 간격으로 바뀌었고, 도시의 경우는 1년 간격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2-3년만 타지에 나갔다 와도 다른 동네가 되기도 하는 시절이었다. 분명 국민학교 때의 할머니집은 초가집이었으나, 중학교 때는 양옥집이 되어있었다. 한국은 본격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의 군사정권의 실권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군사정권이라는 것도 싫었고, 억압받았다는 생각도 한국을 벗어난 시점에서 알게 되었다. 더욱 나에게 싫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은 나에게 행한 엄청난 세뇌작업이었다. 난 정말로 순수하게 10대 시절 공산당(북한사람들)은 피부색이 빨갛고 털이 나서 짐승처럼 생긴 생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생김새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세뇌의 무서움과 그렇게 보낸 나의 시간들이 너무 안타깝고 허무하여 한국을 영영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연곡절 끝에 지금은 한국인으로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