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우리
1960년대의 기억은 우리에게는 흑백사진처럼 오래된 기억이다. 그런 빛바랜 기억에서 추억은 구루마에 만든 무대위의 흔들리는 목마앞에서 인상 팍 쓰며 찍은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런 오랜 기억은 언제나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기억에 자리한다. 나의 그 어린 시절, 아직 여섯이 되기 전의 이야기이다.
부산에는 아미산이 있고, 아미산 아래 아미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나의 부산에 대한 기억은 이 아미동에서 시작한다. 아미동에서의 대부분의 기억은 동생들과 연결되어 있다. 당시 원양어선을 탔던 아버지는 집에 있었다는 기억이 없다. 어딘가에(아마도 미용실이었던 듯하다) 일하러 다녔던 엄마랑 나랑 여동생이 살고 있었던 어느 겨울, 어른인지 어른에 가까운 청소년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누군가가 엄마가 동생을 낳을 것이라 했다. 그날 하나뿐인 방에서 엄마는 남동생을 낳았고, 우린 마당의 평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겨울인데 추웠다는 기억은 없다. 그날 바라본 밤하늘은 별이 많았고 내려다 본 도시의 풍경은 교회의 십자가들이 빛났던, 크리스마스였다. 그 풍경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어린시절의 선명한 한 장면이 되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과 차도의 중간에 위치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과 교회 지붕에서 빛나던 십자가들. 그렇게 남동생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는 축복이었을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욕심많은 우리 할머니가 아들 낳았다고 명절에 오라고 했으니까. 나랑 여동생을 낳고는 명절에 시댁을 가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와 여동생은 남동생을 돌보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당시 산동네였던 아미동에는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지내던 경우가 많았다. 나와 내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름에는 남동생을 발가벗겨 대야에 담궈서 물장난을 치고 놀았고, 배고프면 엄마가 준비해서 찬장에 넣어 놓았던 반찬을 꺼내어 먹고, 설거지 하다 그릇을 깨기도 일쑤였다. 어느날 배가 고팠던 나는 쌀을 씻어 밥솥에 밥을 했다. 나름 엄마가 하던걸 열심히 기억해 따라했는데 밥모양과 밥맛이 났다. 그날 퇴근하고 온 엄마가 기특하다고 해서 참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남동생과의 어린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연탄불과 관련된 것이다. 그시절, 연탄불은 주 난방이면서 동시에 취사를 담당했던 "불"이었다. 어느 계절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였던것으로 기억되니 아마도 초가을 쯤이었던 것 같다. 쌀쌀한 날씨에 연탄아궁이 주위에 모여있다가 뚜껑이 덮힌 연탄아궁이 위로 남동생이 주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의 잘못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동생의 큰울음 소리에 근처에 있던 엄마가 화들짝 들어와 남동생를 들어다 찬물이 가득 담겨있던 수돗가의 대야에 동생을 담궜다. 나와 여동생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어, 방안에 들어가 가만히 있었다. 그것으로 기억이 끝난걸 보면 아마도 엄마가 야단치지는 않았던 듯하다. 아니면 야단 쳤는데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동생의 엉덩이에는 당시의 사고를 알려주는 흉터가 있고, 우린 가끔 그 때의 이야길했다. 어른이 된 어느날, 놀리듯이 남동생의 흉터에 대해 장난 삼아 이야길 하던 중 남동생은 진지하게 '엉덩이 흉터이야기는 그만하자'라 했고, 그 뒤부터 우린 그 흉터이야기를 멈추었다. 그 사건 이후 막내가 생겼다. 막내 동생이 태어났던 날에 대한 기억은 없고 그냥, 어느날 동생이 생겼다.
세월이 지나 나는 아미국민학교(당시의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때도 엄마는 일하러 가서 옆집 할머니랑 옆집아이랑 같이 입학식에 갔던 기억이 있다.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입학사진에는 나와 옆집할머니와 옆집아이 셋이 찍혀있다. 그아이도 엄마가 일하러 다녔던 것 같다. 입학식에는 깃끝이 둥글고 하얀카라의 검은색 교복의 왼쪽 가슴에 하얀 거즈손수건을 접어 옷핀으로 고정하고 운동장에 나란히 줄을 서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선생님들을 소개받은 후 우리는 각자의 교실로 갔다. 당시, 아미동의 인구밀도가 높아 하나밖에 없는 국민학교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많은 학생수로 하여 한 반을 오전반, 오후반 나누어 80명이 넘는 학생의 수업을 했다. 하루는 오후반 수업을 마치고 교실 책상에 딸린 서랍안에 낱말카드를 놓고 하교하였다가 다음날 등교를 하니 낱말카드는 없어졌다. 나는 선생님에게 낱말카드가 없어졌다고 했지만 찾아주지 않아 참으로 섭섭했던 기억이 있다. 1학기를 마치기 전 우리가족은 영도로 이사를 하면서 영도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곳은 한 반의 학생이 58명이었다. 오전반, 오후반이 아니라 정말 좋았다.
아미동에서의 기억은 학교 입학을 하면서 끝난다. 그래서 기억이 여기까지이고, 그것도 이글을 쓰기위해 기획하면서 조금씩 기억난 일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삼천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내기억에 삼천포는 없다.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엄마랑 삼천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살았던 동네, 내가 태어났던 집과 선창, 바닷가등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대부분 기억을 못하고, 딱 하나만 기억한다. 자주 놀았다는 선창의 겨울바다에 손을 담그고 놀다가 동상이 생겨 손이 퍼렇게 되고 아팠던 기억이 그것이다. 그뒤 여러해 동안, 해마다 동상이 재발하여 여러방법을 썼지만 손은 차가웠고 색깔도 변했다. 겨울 동안에는 밖에 나갔다 따뜻한 집에 돌아오면 손이 많이 가렵고 아팠던 기억이 있다.
내 어린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아미동에서 시작되었다. 아미동의 산동네, 대문도 없는 그 집, 바로 앞이 낭떠러지였던 제일 꼭대기의 집에서 동생들과 떠들고 싸우면서 그냥 해맑게 놀았던 기억만 있다. 아미동을 떠난 후에는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바뀌어 그때의 흔적은 없을 것이다. 얼마전 궁금하여 인터넷 지도로 아미국민학교(지금은 아미초등학교)를 찾아보았다. 사진으로 보는 아미초등학교는 내가 몇개월 밖에 다니지 않아서인지 기억에 없고 낮설었다. 그 근방의 산동네의 사진들도 낮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사진으로 보아서 그럴것이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지만 나는 아미동의 이야기를 한다. 아미동은 내 어린시절 기억의 시작이고 내 인생의 시작점인것 같다. 누구나 인생의 첫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첫 기억이 나 처럼 4-5세 경일 수도 있고, 더 어릴 수도 있다. 인생의 첫기억이란 첫 사건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인생의 첫사건이 4-5세에 형성되어 첫기억이 그때 그시절로 박혀 버렸을 것이다. 인생의 첫기억은 누구나에게 있지만 그것을 기억하면서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은 누구나 갖지 못한다. 글을 쓰면서 첫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지금이 기쁘다. 이렇게 첫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쁘다. 비록 대문도 없는 부엌딸린 한 칸짜리 방에서 지낸 기억이지만 동생들과 걱정없었던 그 시절을 기억할 수 있어 기쁘다. 그리고 이제야 감사하다.
아미동이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지금은 비석마을로 다듬어져 관광지가 되었단다. 나는 그 축대에 박아놓은 비석에 베어서 생긴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108
[정의]부산광역시 서구에 있는 법정동.
[명칭 유래]움집을 의미하는 ‘애막’이라는 옛말이 변하여 한자로 아미(峨嵋)가 되었다는 설과, 이곳에 반월형의 토성이 있었는데 이것을 아미월(峨嵋月)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형성 및 변천]조선 후기 동래부 사하면 구초량리 지역이었으며, 1896년(고종 33)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부민리 일부를 분리하여 곡정(谷町) 1·2정목(丁目)이라 하였다가, 1947년에 아미동 1·2가로 개칭하였다. 1951년 서구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로 서구가 되었다. 1963년에는 부산직할시 서구가 되었으며, 1966년 행정동으로 아미 1동·아미 2동을 분동하였다. 1995년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1·2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서구의 중앙에 위치하여 동으로 토성동, 서로는 사하구, 북으로 부민동, 남으로 초장동과 접한다. 서쪽에는 아미산[163m]이 있고, 아미산에서 북쪽으로 시약산이 천마산으로 이어져 북쪽과 서쪽을 산지가 에워싸고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은 동쪽으로 흐른다.
[현황]2021년 12월 현재 면적은 0.72㎢이며, 인구는 3,872가구에 총 6,653명으로 남자가 3,364명, 여자가 3,289명이다. 아미동 1가에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이 있다. 1885년 만들어진 부산공립병원의 후신으로 193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이 함께 있었으나 양산시로 이전하여 지금은 병원 기능만 한다. 아미동 2가에는 부산광역시 아동보호종합센터가 있다. 이는 1987년 부산직할시 아동청소년회관으로 시작된 것이다. 법정동인 아미동 1·2가는 행정동인 아미동의 관할 하에 있다.
https://www.koscaj.com/news/articleView.html?idxno=76967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10630.22022202317
아미동은 굴곡진 부산 현대사 '경계의 땅'
문학·역사·사회학자 등 10명, 증언·관련자료 찾아 책 발간
남차우 기자 nam@kookje.co.kr | 입력 : 2011-06-29 20:26:59
이정도 소개하겠다. 궁금하신 분들은 좀더 많이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