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국민학교, 그 시절의 초등학교!
나에게 있어 부산의 기억은 아미동에서 시작하고, 국민학교의 기억은 아미동에서 영도로 옮겨간다. '아미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영도로 이사를 하면서 '영도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대교동에서는 영도국민학교, 길 건너 대평동은 영선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교동과 대평동은 둘 다 바닷가 마을로 대교동은 영도다리로부터 시작되어 다리아래로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가 있었고, 대평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자갈치 시장을 마주하는 위치로 통통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대평동은 "깽깽이마을"로 다시 정비된 것으로 안다. 당시 선박의 외부 수리업을 주로 하는 조선소들이 대평동에 많아 대평동의 철공소들은 선박의 외부 수리와 관련이 있었고, 내가 살던 대교동은 선박부품을 위주로 하는 철공소들이 많았다. 그렇게 나는 대교동에 살아서 '영도국민학교'라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영도국민학교는 오래된 학교였다. 내가 64회 졸업생으로 현재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영도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학교로 2014년에 100회 졸업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학교는 1908년 옥성학교로 설립되어 옥성공립보통학교, 목도공립보통학교, 목도공립국민학교를 거쳐 1945년 영도국민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단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기지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을 겪으면서 학교는 그 자리에 존재하여 지금의 '영도초등학교'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7년 복잡한 머리도 식히고, 마음의 정리를 위해 2박 3일의 부산 여행을 했을 때 그 영도초등학교를 방문했었다. 어린 시절에는 굉장히 커 보이던 학교가 왜 그렇게 작아 보이던지, 30년이 훌쩍 지나 방문한 곳이니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했지만 거의 그대로였고, 다만 운동장이 작아 보이는 건 건물이 들어서였을까? 내 덩치가 커져서였을까?
영도국민학교에서의 저학년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흩어진다. 봄에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는 교실밖의 풍경을 보며 글짓기를 하거나 실내화를 신고 밖에 나갔다가 혼난 기억이 거의 전부이다. 고학년 기억으로의 시작은 4학년 때 '제주도교실'이라고 부르던 학교 구석의 교실 2개만 덩그러니 있던 건물에서 수업을 했던 때부터이다. 학교에는 운동장이 두 개 있었다. 본관 건물을 사이에 두고 정문 쪽으로 학교의 행사나 조회를 하는 큰 운동장이 있고, 본관 건물을 돌아 지나면 주로 학생들이 체육시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운동장이 있었다. 작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건물에 교실이 두 개 있었는데 우린 그 건물을 '제주도교실'이라 불렀다. 제주도처럼 외딴곳에 떨어져 있다고 그렇게 불렀다. 그중 한 교실이 내가 4학년을 보낸 곳이다. 3학년까지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성적이 나쁘지는 않아서 여학생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 선생님은 나에게 부반장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시선이 집중되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하지 않겠다고 했다. 4학년이 되어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호감 가는 남학생이 있었고, 선생님이 나에게 부반장을 하라고 했을 때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 아이가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눈을 살짝 감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젓는 모습이 나에게 '그런 거 하지 마'라고 하는 듯이 보였고, 나는 뭔가를 잘못한 아이처럼 얼굴이 빨개지면서 선생님에게 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서 그 아이는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렇게 내 국민학교의 첫사랑이 끝났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고, 동시대회 같은 곳에서 상을 받았다. 그 4학년부터는 많은 기억들이 나의 뇌리에 저장되어 있다. 야외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다닌 기억, 짝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와의 기억, 여름에 송충이 떨어지던 소나무 아래에서 점심 도시락 먹던 일,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고 학교 숲과 건물의 외진 곳에서 곤충을 찾던 일,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갈 때 생각에 잠겨 걷다가 교문을 지나친 일-아마도 4학년 때부터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엄마가 구워 준 비스킷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던 일, 운동회 때 달리기 하기 싫어 교실에서 도시락 먹던 일. 그렇게 4학년을 보냈다. 그리고 5학년이 된 지 얼마 후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기억에 없지만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고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이 없어 다른 반 선생님들이 한분씩 와서 수업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이 하루 종일 우리 교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그냥 떠들고 놀았다.
담임선생님이 없던 그 5학년, 그때부터 나는 교과서는 읽지 않고 다른 동화책을 읽거나 깊은 사색을 하고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리고 한 학기가 끝났고, 아이들은 더욱 자유분방한 여름방학을 보냈다. 숙제라는 것도 없었고,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숙제검사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2학기의 거의 모든 수업이 자습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난 수업을 하고 있는 다른 반의 아이들이 부러워 가끔, 자습을 하는 우리 반을 벗어나 다른 교실의 창문으로 수업하는 것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도록 선생님은 오지 않았고 5학년 1반이던 우리 반 친구들은 그대로 6학년 1반이 되었다. 그때쯤 아이들의 학습능력이 부족으로 '선생님들이 1반을 버렸다'라는 말들이 있었고, 당시 우리 반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더욱 제멋대로가 되었다. 그렇게 6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이 왔는데, 정년퇴임을 앞둔 선생님이었다. 어느 시골의 학교에 계시다가 일반 교사로 퇴임을 하기 위해 우리 학급을 맡게 되어 전근을 오신 걸로 기억한다. 첫인상은 키가 껑충하게 크고 팔다리가 길쭉하여 키다리 아저씨를 생각하게 하는 몸매를 가졌지만 주름진 얼굴에 안경을 쓴 늙은이였다는 느낌이었다. 일 년을 담임선생님 없이 제멋대로 지내던 아이들이 선생님이 생겼다고 조용하지 않았다. 나도 아예 공부라는 것을 하지 않아서 기초학력이라는 것이 없었다. 어린 나의 생각에도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 선생님이 힘들겠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들도 알았던 것이다. 선생님이 늙고 힘이 없다는 것을...
선생님은 학생들을 공부시키려 했지만, 이미 선생님 없이 1년을 보낸 아이들은 제각각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 반은 그냥 그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6학년 1반이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표현인 '버림받은 1반'의 아이들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반항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선생님이 있는데도 싸우고 심지어 수업시간에 뛰어 나가는 아이도 있었다. 그 6학년의 가을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에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그런 쪽으로 명망이 있었던 분이었던 듯하다.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보고 대회에 보내겠다고 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상을 타고, 다른 미술대회에도 그림을 그려서 보내자고 해서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흰색물감을 덧칠하여 '눈 오는 날의 풍경'이라는 제목의 풍경화를 그렸다. 그 그림이 대상을 받았다. 그때 생각이 '이렇게 쉽게 그리고 상을 탄다고? 이 일을 계속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왜 6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을까'하는 아쉬움과 5학년때 선생님이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내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테, 그러면 엄마도 학원에 보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미술학원을 다닌 적도 유치원을 다닌 적도 없다. 어느 날 깨친 한글로 똑똑한 아이가 되어 7살에 입학하게 된 경우로, 입학 후에는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한글만 알 뿐이지 학습 이해도가 부족하여 알려주는 학습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성적은 곧잘 나와서 엄마는 내가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내 기억의 나는 발표도 잘하지 않았고, 숙제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가끔은 내 마음을 들킬 것 같은 그림일기 같은 숙제도 미루었다가 한꺼번에 하였다. 내 생각을 누가 알아차리는 것이 싫었고, 글쓰기로도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 저학년 때 곧잘 큰 백일장에서 상도 받고 해서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교장선생님이 상장을 주면 받기도 했다. 그런 상장들이 쌓여서 상자에 한가득이었으나 우리 엄마는 액자에 끼워 걸어두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내가 꺼내보기도 하였는데, 그 상장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고학년이 되어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에 대상을 받았을 때,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는 것이 참 뿌듯했기에 엄마에게 미술학원을 보내달라고 말했을 때 미술 같은 것은 취미로 하는 것이라는 엄마의 말에 실망을 많이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아마도 친구들의 기억 속의 나는, 저학년 때는 백일장에서 상 받은 친구로 고학년 때는 미술대회에서 상 받은 고집 센 친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난 학년을 올라갈수록 눈에 띄는 학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4학년이 되던 해, 두 살 터울의 동생이 1학년으로 입학하였다. 두 살 터울이었지만 내가 한해 일찍 입학을 해서 3학년의 차이가 있었다. 동생은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에 공부도 잘하고 자신의 의견도 정확히 이야기하는 아이였다. 수줍어하면서 내 의견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던 나와는 다른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나에게서 실패한 경험에서인지 엄마는 동생의 학급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 참여를 했고, 동생은 똑똑한 아이다운 행동으로 학교생활을 유명하게 보냈다. 공부 잘하고, 학교 행사에 잘 참여하는 엄마 덕분에 선생님들에게도 잘 알려진 학생이었다. 엄마는 학교 행사에서 동생 학급에만 참여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00 언니"였다. 어느 날 동생 학급의 행사에 참여하려고 학교에 온 엄마가 운동장에서 나를 만나 용돈을 주고 갔다. 그때 내 담임 선생님인지 동생 담임 선생님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 선생님은 나를 "00 언니예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때 난 처음으로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은 있어서 "00 언니"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6학년에 신문사에서 받은 미술 대상을 받기 위해 조회대로 올라갔을 때도 나는 "00 언니다"라는 이야길 들었다.
국민학교는 우리들의 사회생활이 시작하는 곳이었다. 그때 왜 국민학교라고 불렀는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의 잔재라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은 초중고등학교라고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지금의 아이들과 다르게 당시는 선행학습이라는 것이 없었고, 한글은 학교에 가서 깨치는 것이었다. 당시의 국어책 첫 수업에는 "철수야, 영희야 놀자" "바둑이도 같이 놀자"로 시작한다. 그렇게 놀면서 공부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국어책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미 한글을 깨치고 입학을 하고, 심지어 영어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는 상태로 입학을 하기에 초등 1학년의 영어 듣기 평가도 상당한 수준이다. 우리 시절의 영어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접하여, 그때부터 알파벳이라는 영어 철자 쓰기와 읽기를 시작했었다. 4선의 영어노트에 펜촉으로 필기체 인쇄체의 영어 쓰기를 시작했고, 영어 쓰기 교본은 중학교 입학 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영어 기초였다. 그렇게 촌스럽게 학교를 다니던 우리 세대가 돌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유치원을 보내고, 초등학교를 보낸다. 우리는 칠팔세에 시작하던 학교생활이라는 사회생활을 우리 아이들은 삼사 세에 시작한다. 어른들이 모르는 아이들 나름의 스트레스가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가 4년 정도 어려진 것이리라.
1970년대는 우리나라의 기초를 마련하던 시대로, 그 시절의 학교는 대량 교육을 실시하던 곳이었다. 베이비붐으로 아이들이 늘어나자 학교도 같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의 수용인원이 많아지면 근처에 국민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나누었고, 그 후로도 아이들이 계속 늘게 되면 또 다른 국민학교가 생겨서 아이들이 나누어졌다. 5학년때 이사 간 집의 옆집 아이는 영도국민학교 다니다가 4학년 때 대교국민학교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는 대교국민학교, 나랑 뒷집아이는 영도국민학교를 다녔다. 또, 영도국민학교 바로 앞에 살던 한 아이는 자기는 영도국민학교를 다니는데, 동생은 영선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가까운데 있는 학교를 두고 10분을 걸어 다니는 동생이 불쌍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세대들은 한 학급에 50명씩, 10 학급이 있는 학교를 다녔다. 25명 정도의 아이들이 수업하는 한학급이 5~6개 밖에 되지 않는 지금의 학교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그래도 우리 세대들은 씩씩하게 20대 30대를 거쳐 저마다의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20세기를 탄탄하게 다지는 기초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렇게 40대와 50대가 되어 어느덧 20세기를 돌아보는 나이가 되었다. 과거는 항상 아름답다. 그래서 과거의 추억은 더욱 아름답고 바랜 색의 기억으로 항상 마음 한켠에 묻어둔다. 옛날을 기억하는 노인들의 전유물 같아 보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은 생활의 팍팍함에 묻혀, 잊고 지낸 시간의 기억이다. 그 팍팍한 생활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 지난 시간들이 아스라이 기억에서 올라온다. 그러면 우린, 추억이라는 감상에서 나만의 시간들을 채워가며 이야기를 되새겨보게 된다. 추억은 항상 기쁘지만은 않지만 희미한 기억이 추억을 빛바래게 하여 아름답게 저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추억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항상 아름답고 애틋하다.
* 사진은 '디지털하동문화대전'에서 퍼온 '노량초등학교'의 교정사진이다. 영도초등학교의 교정 사진이 인터넷에 없고, 내가 부산에 살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