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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Nov 16. 2024

목요일의 독서모임과 [틈], 그리고 나의 글쓰기

감성적이면서 세계관을 뚜렷이 가지는 작품을 쓰고 싶다

매월 두번째 목요일이면 몇명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독서모임이 있다. 10명이 조금 넘는 회원들이 있는 독서모임 이지만 참석을 강조하지 않는 내가 주최가 되다보니 느슨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온라인의 모임방도, 오프라인의 모임도 4-5명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소한 모임이 되었다. 

다른 독서모임들은 한 권의 책을 읽고 열띤 토론을 한다고 하는데, 우린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 작가의 작품 중 읽고 싶은 작품을 한 권이상 읽고 와서 각자가 읽은 작품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며 작가의 작품관을 이야기한다. 올 상반기에는 각 대륙에서 나름 읽어야할 작가들을 선정하여 보았고, 후반기인 7월부터는 한국작가들 중 장르별로 선정하여 작품을 접했다. 상반기의 작가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독일), 이스마엘 카다레(알바니아), 니콜라이 고골(러시아), 위화(중국), 마크 트웨인(미국),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였고 하반기의 한국작가로는 이청준, 한강, 황석영, 이영도, 김초엽을 선정하였다. 그래서 10월과 11월은 한국 장르 소설에 대한 작품을 읽으며 판타지와 SF에 대한 한국인들의 작품들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나누었다. 

작가를 선정하고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읽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느끼게 하는 일년이었다. 

나는 독서모임에서 작가들의 글을 작품이라고 부른다. 그림이나 움직이는 영상 뿐 아니라 글로 쓰여진 소설, 시를 포함한 모든 작가가 만든 것들은 예술이다. 아서코난도일이 '레드서클'에서 셜록홈즈의 입을 빌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야"라고 했다. 나에게는 글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소설가들이고, 시인들이고, 수필가이며 저자들이다. 그렇게 글쓰기는 예술이다.  

그런 예술작품을 읽고 몇 명의 사람이 모여 그 작품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나의 독서모임이 이번 주에 있었다. 이달의 작가는 김초엽이라는 젊은 SF작가이다. 난 그녀의 작품중 <지구 끝의 온실>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SF소설이 따뜻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학적이지만 인간의 감성에 기반을 둔 듯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나에게 전해진 그녀 작품의 감상평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감성을 지닌 공상과학 소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글쓰기를 해 본 사람은 알것이다. 현실감성의 공상과학. 그래서 젊은 사람이 참 잘 쓰고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주 목요일 독서모임이 있던 그날은 2024년 수능이 있던 날로 [틈]에 내 글이 올랐다. 작년 수능이 있던 주의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랑 나눈 사소한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쓰게 된 일상의 글이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잠깐 나눈 담소에서 느낀 감상을 글로 풀어 낸 것이다. 그 글이 올해 수능일에 브런치의 관계자들에 의해 [틈]에 올라오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글을 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니 좋았다. 그런데 댓글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제목이 정보를 제공할것 같았는데 아니라는 이야기들과 함께 낚시라는 이야기를 했다.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이 꼭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의미는 아니다. 그냥, 글읽기를 하는 목적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작가 소개가 알려주듯이 이런저런 소리에 상관없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기로 결정한 때 부터 내 글의 비판에 대해서는 초연해 지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댓글들을 보면서 '요즘은 이런 생각으로 글읽기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도 사회과학을 하는 입장이라 정보 제공하는 많은 사이트를 통해 과학적이거나 생활의 정보를 접한다. 모르면 알기 위해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본다. 그런 글들은 많이 읽히고 있다는 의미의 조회수도 많다. 그러나 내가 쓰는 글은 내 생각을 많이 담아내는, 약간은 감정을 터치하고 싶은 느낌으로 글을 쓴다. 화나면 화난다고 이야기하고, 불쌍하면 불쌍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어 글을 적는 경우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나서 항상 제목 정하기가 어렵다. 막상 적고 보니 어떤 제목이 어울릴지 매번 고민한다. 어떤 경우에는 제목을 정하지 못해 묻혀두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틈]에 올라온 글의 제목이 내용과 어울리지 않았나보다. 좀 더 감상적인 제목을 골랐어야 했었나 보다. 그 글의 제목은 학생이 나에게 한 질문을 그대로 정한것이다. 그래야 어울릴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정보를 원하며 글을 읽은 사람들은 실망을 했나보다. 그 글은 내 생각만 있는 글이니까. 설사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어도 읽다 보면 정보제공 목적의 글이 아님을 알아차렸을텐데, 해시태그에도 (감성에세이)라고 되어 있으면 '아 이런 글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그런 여유가 없이 글을 읽어 내려갔을 감정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구나, 그래서 감성적인 글들이 잘 안 읽히는구나'라는 생각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도 글읽기를 할때 첫 몇 문장에서 이건 정보제공이구나 싶으면 끝까지 안 읽기도 한다. 새로운 정보를 알고 싶으면 정보 제공하는 공식적인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정확하니까. 그러나 감성을 적어내려가는 글은 작가의 마음이 궁금하여 끝까지 읽어내려간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되면 기쁘기도 하다.


우린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정보의 홍수속에 살게 되어서 타인의 생각도 정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글이 정보를 제공하는 글일 수는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정보를 제공하는 글을 원하면 그런 글을 쓸 수 밖에 없을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은 나는, 정보가 아닌 감성을 전달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이자 내가 쓰게 될 글이 될것이다. 

이 일로 하여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한 정보를 제공하는 그런 글이 아닌 감성적인 글을 덜 감성적이면서 드러나지 않는 서사가 바탕에 깔린 건조한 작품을 쓰고 싶다. 그런 글이 나의 작품이었으면 한다. 독서모임을 토대로 내가 읽은 작가들의 작품처럼 말이다. 그렇게 감성적이면서 세계관을 뚜렷이 가지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다짐하게 되는 경험이 되었다. 그래서 브런치스토리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의 방향성을 확실히 공표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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