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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Nov 26. 2022

친구, 꼭 옆에 존재해야만 하는가?

인간관계속의 친구관계

  사람들은 '친구'라면 무얼 가장 먼저 떠올릴까? 나는 친구 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공감 가는 노랫말이 어느 날 가슴을 파고들었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들어 주던 너...' 이렇게 시작하는 이 노래는 안재욱이 2003년에 대만의 가수 주화건의 '붕우'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부른 노래이다. 중국어 가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번안 가사는 한국인의 정서에 딱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가끔 노래방에서 즐겨부르며 지난시절의 친구들을 떠 올린다. 10대를 거치며 중학교, 고등학교의 친구들 중 아직도 연락하는 영숙이, 20대의 대학시절의 많은 추억을 공유하는 래순이, 외국 생활에서 처음가진 외국인 친구 이집트인 아자, 이렇게 세 명을 나는 친구라고 부른다. 아자는 기억속의 친구이고, 래순이랑 영숙인 각자의 생활 중 가끔 연락하면 반가운 친구이다.


  현재의 나에게 친구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흔히 직장동료도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관계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때는 남편의 친구가 내 친구였고, 아이의 친구 엄마가 내 친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중년을 지나는 나는 '친구'라는 주제가 가지는 무게감에 잠시 머리 속이 멍해지며 '친구'라는 말이 가지는 힘이 나에게 많은 감정들에 빠지게 하며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내가 참 씁쓸하다.

  사회의 주변인이고 싶었지만 결국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학창 시절의 친구가 있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일 때는 친구들을 만나면 좋았다. 그 시절 대 선배가 했던 "친구도 결혼하기 전이지, 결혼하고 애 키우면 친구 만날 시간 없어. 아니 친구를 잊어버리게 돼."라는 말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그 말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꼈다. 결혼한 여자에게 있어 친구는 희미한 얼굴이고, 추억이며, 아련한 옛이야기가 된다. 결혼 초에는 내 친구보다는 남편의 친구를 만났고,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어쩌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내 친구는 서로 시간에 쫓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도 힘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아이가 다 자라고, 이제야 돌아보는 주위의 친구들은 어느덧 현재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로 메꾸어져 있다. 나는 태어난 곳과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곳과 사회생활을 했던 곳, 그리고 결혼을 하고 지낸 곳과 지금 생활하는 곳이 각기 다르다. 이런 나의 삶에서 친구는 오래된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생명들이고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 중에 나와 인연을 맺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살아가는 세월이 싸여갈수록 알아가는 사람들도 싸여간다. 내가 맺은 인연 중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떠 올려보면 내가 보인다. 아니, 나의 인생이 보인다. 나와 어울리던 많은 인연들이 친구라는 테두리를 두르며 내곁에 머무르다 나이가 들고 생활 반경이 변하면서 친구의 테두리가 점점 좁아져 간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이 테두리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나가기를 여러번. 몇번의 그런 단계를 거치고 지금 내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친구는 내인생을 말해준다. 현재의 친구는 현재의 내 생활이고 인생이다. 현재 나의 관심사에 따라 친구의 성격이 달라진다. 옛말에 “친구를 보면 그사람을 알 수있다.”라는 말이 심하게 공감된다. 친구는 내가 만나야하는 인연이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친구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에 간직한 친구는 나의 과거와 연결되고 그 친구의 무게는 내 인생의 무게가 된다. 그렇다고 친구가 지니는 그 가벼움의 무게를 또 무시할 수 없는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옛 성인들은 살면서 진정한 벗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관계가 힘든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마음을 줄 수 있고,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가진다는 것이 정말 힘들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누구나 친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친구는 왜 ‘가진다.’라고 표현을 할까? 사람과의 관계 맺음을 사귄다고 표현한다. 사람은 사귀고, 애인은 있고, 친구는 가진다. 가진다는 표현은 나의 소유인 것이다. 친구가 내 마음을 몰라주면 우리는 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그 좋던 관계는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미움과 저주로 바뀌면서 생각할 수록 불편한 관계가 된다. 그런 관계는 진정한 벗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옛 성인들의 진정한 벗은 가지는 것이 아닌 관계를 맺어가는 상대로서의 진정한 벗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벗과 친구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친구관계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맺는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맺으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친구도 관계라고 생각하는것이 오랫동안 유지 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인연이 셋 존재하고, 지금은 생사도 알 수 없는 이집트인 아자를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 까마득한 30년 전의 인간관계로 여지껏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Nov-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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