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
새로운 달력이 걸렸다.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간들이 내 삶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새로운것은 어디에도 없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반복이 매 시간 지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노화되는 세포들이 시간과 발을 맞추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다.
나의 시간이라는 것도 없다.
새로울 것 없는 숫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것 처럼 얼굴을 붉힌다.
나는 그렇게 새로움에 새롭지 않은 감정들을 쌓아 새로움인 마냥 감격해야 한다.
그래서 세월은 흐른다고 하고, 강물을 들먹이며 새로운것 마냥 홀리고 있다.
정해진 것에 동조하지 않으면 다른 부류의 생명체라는 낙인이 찍힌다.
나의 낙인은 어디에서 찍힌걸까?
고장난 시계는 멈추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장이란 것을 모른다는 노랫말이 머리속을 후빈다.
고장난 시간이라는 새로운 시간이 나에게 시작되었을까?
시간은 고장이라는 것이 없고, 시계는 고장나서 멈추어 버린 것에 새로운 시간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나를 묶어두는 것이다.
시간의 노예!
모든이들이 시간이라는 것에 충성을 한다.
아니,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생활속에서 실현하는 엄청난 사건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사람들에게 시간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고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어느 누가 그런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처음으로 지시했을까?
시간의 개념을 구체화 시킨 숫자들을 맹신하는 연금술사들이 밉다.
나에게 시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시작된 구속이다.
시간은...,
시간은...,
그렇게...,
나를 노화시키고 있다.
인간의 시간은 지구에 머물고, 지구는 점차 사망을 향해 달려간다.
시간은,
시간은,
나는,
나는,
그렇게
목숨을 흘려보내고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누가 가장 기뻤을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면서 세상의 시간과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시간은 어떻게 그런 개념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생각들은 과학자들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설명하면서 세상사람들은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찾아온 의문은 그렇게 과학적 풀이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머리(이성)에서만 머문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으로 이해하는 시간은 같은 60초가 아니고 같은 1분이 아니다. 개인사에서 시간들을 들여다 보면 5살의 한시간과 50살의 한시간을 엄연히 다르다. 10대 이전의 시간들은 천천히 흐르며 많은 생각과 활동들을 할 수 있다. 10대에 들어서면 1년이라는 시간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어쩌면 일주일만에도 인생이 바뀌는 선택의 기로에서 48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48시간은 20대에서 한달의 시간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10대의 1년이 20대의 3년이 된다. 그리고 30대의 5년이 되고, 40대의 8년이 된다. 그래서 시간은 화살과 같아 흐를수록 가속도가 붙는다고 한다. 그렇게 50이 되면 1년이 20대의 한달이 된다. 그래서 눈 감았다가 뜨니 50대 후반이 된다. 60대는 또 어떤가? 그렇게 우리는 눈앞에 60대, 70대가 되고 넘지 못하는 80대를 넘기고 있다. 옛말에 80이 넘으면 '남의 목숨'이라고 하였다. 외할머니가 90세가 넘어 돌아가시면서 '남의 목숨 많이 살았다.'라고 하신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시간은 지날수록 빨라지고, 노화는 20대를 지나면서 시작된다고 한다. 우린 100세 시대에 살아간다고 한다. 그럼 20대 부터 시작되는 노화는 80년동안 진행이 될것이다. 80년 동안의 노화는 의학사의 숙제가 될것이다. 그럼에도 의학에서는 죽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의 목숨을 살려낸다는 것이 의사들의 자만심이었는데, 사람들이 많아진 현재의 지구에서 지속적으로 살려낸 목숨들이 많아지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 본다. 물론, 목숨은 유지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현상도 자연스런 진리라는 생각을 해야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우린 많은 시간들을 '나'가 아닌 '남의 시선'을 위해 살아왔고, 살아가야 한다. 사회에 속한 인간들의 군상은 사회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며 유지시켜야 한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었고 사회속에서 인간성이라는 것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사회를 떠나서 생각하는 인간은 원시적인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자연과 어울리고 사회를 떠나서 생활한다고 그 개인의 생활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의 많은 구성원 중 하나로 생활하면서도 사회의 한 단면에서 생활하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속한 사회가 있고, 너가 속한 사회가 있다. 내가 가진 재화로 나는 나의 터전을 만들고, 내가 가진 지식으로 직업을 가지고, 내가 가진 상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분야는 기계가 보여주는 화면과 나와 교집합을 이루는 시간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지식과 상식을 넓혀나가기도 하지만 나의 영역이나 터전은 아닌것이다. 나는 나만이 속한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을 지키고 싶어하며, 타인이 내 가족의 일부를 빼앗으면 분노를 하고 신경을 쓴다. 마찬가지로 나는 정치인이 아니기에 그것에 대해 모르고, 내가 정치를 할것이 아니기에 관심만 가지고 주위에다 의견을 쏟아내기만 한다. 내가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하면 관심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토로하며 실천에 옮기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린 '남의 시선'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계만을 고집할 수 없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기위해 '남의 시선'은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시선이 된다.
나의 시선은 나에게만 쏠리는 관심을 어떻게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의 시선!' 가장 중요한 시선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천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는 시선이다. 특히 젊은 시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Feb-4.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