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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Aug 13. 2022

우리의 관계주의

이직으로 새로운 관계 형성을 위한 나에게 주는 위로.


  심리학 교수 김경일 선생님이 한국인만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이야기하는 유튜브에서 ‘원숭이, 곰, 바나나 ‘를 보여주면서 관계있는 것 끼리 묶어보라면, 유럽인들은 원숭이와 곰을 묶는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인만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다고 한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왜 한국인은 원숭이 동물, 곰 동물이라는 관계성으로 묶지 않고 동물 원숭이와 식물 바나나를 묶는지 알 수 없다.'라는 의문을 나타냈단다. 그는 한국인만의 특성이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다고 하면서 한국인이 가지는 "관계주의"의 특성을 설명한다. 한국인은 원숭이와 바나나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렇다. 나도 바나나와 원숭이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곰과 원숭이는? 원숭이와 곰도 관계가 있다, 동물이라는. 하지만 원숭이와 바나나만큼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나나를 먹는 동물은 많다. 그런데 왜, 유독 바나나와 원숭이를 관계시킬까? 내 생각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는 '선입견'이 아닌가 한다.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고정적으로 원숭이와 바나나가 자리 잡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지역에 대한 선입견, 학교에 대한 선입견, 직업에 대한 선입견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선입견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바라보면서 나를 위로하고 다독거린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점(点)과 무속(巫俗)에 대한 믿음은 개개인의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분야이다. 중년에게는 직종에 따라 관계를 이어주는 많은 부분을 점(点)과 무속(巫俗)이 차지하기도 한다. 


  관계주의는 한국사회에 그냥 문화처럼 자리 잡은 느낌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우린, 족보를 묻는다. 성씨가 같으면 본관을 묻는다. 혹시 나와 같은 본관일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또는 나처럼 경상도 말씨를 아직 버리지 못한 타향 사람들을 보면 경상도 어느 지역인지 물어본다.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학연과 지연을 알려고 하며, 그것으로 나와의 관계를 엮어본다. 그래야 더 친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아이가 있으면 아이들의 학연에 따라서 엄마들의 친분관계도 새로이 작성되기도 한다.

  대도시에서는 서서히 사라지는 추세의 관계주의의 최고 절정은 제주의 '괜당'이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얼마 전 끝난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서도 소개된 '괜당문화'는 제주에만 있는 듯이 여겨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들의 젊은 시절에는 어느 마을이나 존재했다. 어른들이 "옛날에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다 알고, 그 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다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계주의"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1970년대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앞집에 누가 살고, 윗집에 누가 사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궁금해해서도 안되고, 기웃거려서도 안된다. "관계주의"는 도시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주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런 문화들은 보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시화에 걸림이 된다는 면도 부각되고 있다. 우린 도시화도 해야 하고, 문화도 지켜야 한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둘 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전통을 지키면서 발전하기. 현대에 주어진 과제인 듯하다. 


 나도 관계주의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무의식적으로 주위에 관계를 정한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대가 나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되어 있어야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노력들이 있고 난 후에 그 사람과 나, 그 조직과 나를 관계 지어버린다. 그러나 그런 관계 형성이 전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사람과 나, 그 조직과 나를 부정적인 관계로도 정의한다. 나는 가끔 "나와 어울리지 않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면 '나랑 코드가 맞지 않다'라고 해석될 것이다. 그렇게 부정적인 관계로 정의가 되면 나와는 관계가 없었으면 한다. 이런 표현들이 직장에서 쓰이면 업무의 효율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난 직장에서 지시를 하기도 하지만 지시를 받기도 하는 중간관리자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안에서 내 의견이 무시되거나, 상사의 일방적인 지시가 내가 추구하는 것과 다를 때에는 나도 모르게 불쑥 "이번 건은 나랑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살짝, 한발 뒤로 물러나면 눈치 빠른 동료들이나 지시받는 입장의 직원들이 처리를 해준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요. "라고 말하면서도 처리하여 결국 마무리를 한다. 난 이런 좋은 동료들과 일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직장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하게 된다. 현재 근무하는 건물에 인테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근무하면서 시설적인 면이 아닌 것은 전부 내가 셋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손길이 거치지 않은 물품이 없고, 내 생각이 깃들지 않은 제도가 없다. 그러나 8년이란 세월이 나를 고인물로 만들고 있던 중,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혹자는 '여태 고생해서 만들었으니 지금은 누리면서 편하게 근무하는 게 좋지'라고 말하지만 제주말로 '느랏해지는'것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적극적으로 지시하는 입장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작동한 것인지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고생했는데, 아깝지 않아?'라고 했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새롭게 뭔가를 또 만들어야 하는 일은 힘들겠지만 한 부서의 수장이 되는 것은 전문직이라면 한 번쯤 꿈꿔보는 일 일 것이다. 특히 병원급에서의 직종은 정해져 있어 진급이 제한된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의료 부서와 의료 지원부서로 나뉜다. 의료는 진료에 해당되는 일을 하는 의사, 간호사, 약사 등이 포함되고 나머지 직종은 의료지원으로 병리, 방사선, 물리치료, 영양, 원무, 시설, 행정 등등을 포함한 각종 전문직들이다. 난 의료인에 속하는 간호사이다.(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간호사는 의료인이지만, 간호조무사는 의료인이 아니다. 한국의 법은 그렇게 되어 있으니 주위의 간호조무사에게 의료인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우리나라의 의료인은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약사, 간호사, 조산사 이렇게 6종 밖에 없다) 나처럼 작은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수장은 간호부(과)장이다. 수간호사는 계장 또는 대리급에 속한다. 아마도 요즘은 팀장급이 수간호사일 것이다. 현재 수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병동의 모든 제도가 내 머리에서 나와서 내손으로 다듬어졌다. 물론 윗선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특별한 무리가 없다면 거의 내 의견을 허용해 주었다. 이런 곳을 떠나 새로운 조직의 간호 과장직을 맡기로 했다. 현재의 직을 떠나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였지만 한 단계 승진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작동하는 순간, 축하해주었다. 나에게 들어온 제의를 난 "스카우트당했다"라고 표현했고, 동료들은 섭섭하지만 축하한다는 의견들을 주었다. 이런 상황이 "내가 관계 형성을 잘하면서 살았구나"라고 느끼게 해 주어 나 자신이 흐뭇하고, 동료들이 고맙다. 또 다른 관계 형성을 위한 공백을 잠깐 가지기로 했다. 나에게 주는 짧은 휴식이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고난을 준비하는 시간들이 되어야겠다.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나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Aug-1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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