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 간호사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보고서로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수많은 논쟁을 불러온 작품이다. 이 책은 2~3년 전 설민석이라는 국사 강사가 책 읽고 내용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적이 있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읽어보기로 결심을 했지만 이리저리 미루다 결국 8월 마지막 날에 읽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이 책의 내용은 독일에서 일어났던 유대인 학살의 주범으로 불리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책을 집필한 한나 아렌트에 대해 잠시 간단히 살펴보자.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독일 상류 시민계급에 동화된 비교적 부유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철학과 신학에 관심을 보이면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이데거 철학에 매료되어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그의 지도하에 철학을 공부하지만 결국 그를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야스퍼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 나치의 집권이라는 암울한 상황에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1933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에서도 시온주의자들과 활동하다 1937년 나치에게 시민권을 박탈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국적을 취득할 때까지 무국적자 생활을 한다. 미국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책임편집자로 일하면서 유대인을 도우며 [전체주의의 기원]을 1951년에 집필하게 되며 본격적인 정치사상가의 길을 걷게 된다. 시카고 대학교 교수가 된 1963년에 자신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혁명론]과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간해 지성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1970년부터 아렌트는 정치적 악을 유발하는 정신의 문제, 즉 [인간의 조건]에서 남겨놓은 사유, 의지, 판단의 정신적 활동을 총 3부작으로 서술하기 시작했으나 마지막 부분인 '판단'을 완성하지 못하고 1975년 12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 책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진 아렌트가 유대인에게 아픔을 준 아이히만을 너무 객관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서 비판받았던 보고서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아렌트는 책의 서론에서 악의 평범성에 관해서 " 악의 평범성, 이는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낼 뿐이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아이히만이 나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의견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주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이 책의 177페이지에서 180페이지까지 언급되는 가스 학살과 당시의 독일인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단 177페이지에서 시작되는 부분을 인용한다.
- 최초의 가스 방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한 1939년 9월 1일자 포고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해 건설되었다.(가스 학살을 ‘의학적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는 세르바티우스의 놀라운 확신을 고무한 것은 아마도 이 같은 가스의 ‘의학적’ 기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생각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다. 1935년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자신의 제국 의학 지도자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전쟁이 발발하면 이 안락사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전시에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 포고령은 정신병자들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수행되어 1939년 12월과 1941년 8월 사이에 대략 5만 명의 독일인들이 시설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해되었다. 이 시설에 설치된 죽음의 마을은 나중에 아우슈비츠에서 그랬던 것(샤워실 또는 목욕실로)과 똑같이 위장되었다. 이 계획은 실패작이었다. 주변의 독일인들에게 감추고 가스 사용을 비밀로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학의 본질과 의사의 임무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을 아직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저항이 있었다. 동부지역에서의 가스 사용(나치스의 용어로 하면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함으로써’ ‘인간적인 방식으로’하는 살인)은 독일에서의 가스 사용이 중지된 거의 같은 날에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안락사 계획에 고용된 사람들은 이제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시설들을 만들기 위해 동부로 보내졌다. 그리고 이들은 히틀러의 자문실 출신이거나 제국보건부 출신이었는데 그때부터 힘러의 행정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가스 학살은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이유로 독일인들에게 먼저 시행되었다. 의학적으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계획되어 먼저 독일인들에게, 아니 독일 국적의 정신병자들에게 수행된 이 '안락사'를 빙자한 가스 학살의 실험은 어쩌면 독일인들이 쉽게 이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에서도 "안락사"에 대한 의견은 전 세계적인 의료문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안락사"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이 다르고,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가고 있다.
이 부분의 앞장에서는 당시 나치하의 엄격한 '언어 규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언어는 생각을 지배한다. 이 언어 규칙에 따르면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특별취급'등과 이송이나 이동에는 '거주지 변경',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러한 언어의 선택들은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나치하의 거의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처음에는 언어 그대로 이해했으리라 생각된다. 나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했겠지만 그마저도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아!, 그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부문을 인용한다.
- 앞서 언급한 레크말레체벤은 농부들에게 격려 연설을 하기 위해 1944년 여름에 바바리아로 갔던 한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기적의 폭탄’과 승리에 대해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다가올 패배에 대해 농부들에게 솔직히 말했고, 여기에 대해 훌륭한 독일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해 전쟁이 불행한 종말을 맞을 경우를 대비하여 가스 사용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오, 맙소사.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이 사랑스런 여성이 허깨비가 아니라니, 나는 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40대를 바라보는 노란 피부의 미친 눈을 가진 여성을.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 이 바바리아 농부들이 죽음에 대한 그녀의 준비된 열정을 식혀주기 위해 호숫물에 빠뜨렸는가?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다음 이야기는 핵심에 더욱 근접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도 당원도 아닌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1945년 1월, 러시아가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폐허지를 점령하여 연방으로 합병시키기 며칠 전 독일의 다른 변방인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한스 폰 렌스도르프 백작이 『동프러시아의 일기』에서 언급한 것이다. 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들을 의사로서 돌보기 위해 그는 그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교외에 있는 한 커다란 피난민 센터로 불려 갔는데 그곳은 이미 붉은군대가 장악해 있었다. 거기서 어떤 여성이 다가와 수년 동안 앓은 정맥류를 보여주면서 지금 시간이 있으니 바로 치료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탈출하고 치료는 나중에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에게 애써 설명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나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들이 제국으로 모두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러시안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에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나는 은밀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대부분의 실화처럼 이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다. 한 목소리, 더욱이 여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싸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버렸으니!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시의 언어 규칙이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독일인들은 나치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모두 나치처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고, 그것은 히틀러가 원하는 대로의 나라가 형성되었다고 생각되었다.
난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어떤 생각으로 이 보고서에서 '악의 평범성'을 말했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히틀러는 어떻게 나치하의 독일인들의 생각을 그렇게까지 세뇌시킨 것에 대해 경탄을 했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 그런 세뇌당한 생각들을 유지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며 동시에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의 교육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명 국민학교 시절 받았던 반공교육과 미국 영향을 받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도들이 생각났다. 나중에 내가 직접 팔레스타인들에게서 들었던 그들의 역사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민족대 민족의 땅뺏기 전쟁! 이러한 것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앞에서 인용했던 부분들에서 나는 가스를 사용한 "안락사"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하고 싶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러한 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최초의 가스 방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행해진 가스 학살의 시초가 이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객관적이면서도 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 안락사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서 안락사는 개인이 선택하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대한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개인의 죽음을 결정한다는 발상은 대단히 전체주의적인 발상인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이지만 허점이 있는 인간들을 독일에서 제거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하류시민으로 낙인 된 유대계 독일인들에게는 성공적으로 시행되었고, 패전 후의 독일인들도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해 전쟁이 불행한 종말을 맞을 경우를 대비하여 가스 사용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나에게 일본이 패전하자 자결을 선택한 일본 사무라이와 패전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한 일본 병사가 생각났다. 물론 지금의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당시의 독일인과 일본인들과는 다르겠지만 전쟁을 일으킨 민족들의 공통점인 것 같아 보인다. 패전하면 죽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 전쟁은 정말..., 결국 이야기는 전쟁으로 까지 와버렸다. 전쟁범죄자의 재판을 다루는 책을 읽고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팥 없는 팥빙수 같은 이야기겠지. 하지만 오늘은 가스를 사용한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 일반인들과 교회의 용기 있는 몇몇 고위 성직자들의 저항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 정신병자들에 대한 가스 처리가 중지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빈번하게 지적되어왔지만, 한편으로 이 계획이 유대인의 가스사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저항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살인센터 가운데 몇 곳은 당시 독일 영토 내부에 위치하여 그 주위에 독일 주민들이 살고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
책에서는 이렇게 연결이 된다. 가스를 사용한 고통 없는 죽음이 유대인에게 옮겨졌을 때 독일인들이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제거되어야 할 민족이라는 의식이 정서의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이해된다. 핍박받는 민족, 한때는 우리나라도 그런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핍박받는 민족이며, 외세의 침략이 끊임없이 있었다고. 하지만 유럽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의 횟수는 그냥 그림책 수준이다. 중국과의 비교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역사는 많은 전쟁과 나라가 바뀔 때마다 지배 민족 자체가 교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러한 민족적 피해의식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남아있는 교육의 피해이다. 우리도 이렇게 일본의 세뇌로 민족 자체의 존재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하다 보니 주제에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다음에 정확히 다시 정리하여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한번 하기로 하고 여기서 맺어야겠다.
Sep-3.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