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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Mar 15. 2023

General Medicin Ward I

General Medicin Ward I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도착 후 리야드 센트랄 호스피탈, 일명 RCH로 불리던 병원이 내가 근무했던 곳이다. 한국에서의 임상경험이 없는 나는 한국간호사로만 이루어진 내과병동에 근무하게되었다. 대학의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병원 구조는 3층이하의 낮은 여러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졌고, 내과병동은 정문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걸리는 안쪽에 위치한 1층짜리 건물로 화장실이 딸린 6인실 6개와 격리실을 겸하는 1인실 1개로 이루어진 병동 4개와 약국, 방사선실, 몇개의 의국과 서번트라고 불린 도우미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가지고 있는 단독 건물이었다.

  근무 첫날은 간호사로서의 오리엔테이션이 병원에서 시작되었다. 병원 간호국에는 사우디안 총괄부장이 있고 한국인 간호부장이 한국인 관리만 따로 했다. 한국인들이 아랍어가 서툴기도 했지만 원래 한국 간호사들이 병원을 주도했었는데, 그 수가 줄어들면서 다른 나라의 간호사들이 들어오면서 관리방식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간호부장의 파워가 병원내에서는 서열 3위하는 말을 들었다. 병원장, 부원장 다음이라는. 병원에서의 근무가 실습이후로 처음인 나는 오리엔테이션이 생소하지만 병원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같게 했다. 병동 전체, 아니 건물전체가 한국인으로만 이루어진 내과병동을 위주로 오리엔테이션은 이루어졌고, 외과계에서는 화상병동과 죄수병동만이 한국인들이 근무하였다. 그외 외과계와 아동및산부인과, 행정부 건물들은 여러 국적이 섞여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경력이 많지 않은 나는 내과 일반병동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비행기 동기 3명이랑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동기의 이름은 잊었지만(나는 어찌된 일인지 이름을 잘 기억 못한다)발령받았는데, 경주 출신으로 경상도 억양이 너무 강하여 영어도 경상도식으로 발음하여 문장의 끝을 내려서 말하는 습관으로 여러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 '헬로우'는 나에게 미소를 안겨준다.

  내과병동의 건물에는 4개의 병동과 일반 방사선실, 임상병리실, 약국 및 내과 의국, 세탁실, 보조직원실 등이 있었고, 환자식사는 레스토랑 건물에서 차로 운반을 했다. 내과병동 건물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근무를 하고 있어서 한국인 병동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의사들은 다국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간호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약사 및 약사보조는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1989으로 접어들면서 많은 한국인들의 계약종료로 동아시아인들, 특히 필리피나들이 한국인의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간호감독에 의해 며칠동안 시행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나를 포함한 3명의 신규가 일반내과 남자병동에 배치를 받았다. 그곳에서 다시 며칠에 걸쳐 병동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액팅(주로 환자에게 주사를 주거나, 혈압측정하는 등의 직접적인 간호를 제공하는 간호사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부터 시작하였다. 병원을 처음 개원할때 한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병동시스템을 구축하였다는데 한국인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필리핀, 인도 및 아시아계의 간호사들이나 아랍계의 간호사들에게 많은 병동을 넘겨주고 내과병동만 한국인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고, 그래서인지 서울대병원 시스템으로 병동을 구축하여 내과병동은 Functional system을 유지하고 있었다. 낯선 이국어를 말하는 환자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의료진에 간호사들끼리는 한국어를 섞어 말하는 3개국어를 혼용하는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환자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아픔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아라빅을 비롯하여 무엇을 요구할때 환자들이 사용하는 아라빅도 알아야 하고, 의사 및 직원들과는 영어로 소통을 하고, 한국인들끼리 인계할때는 한국어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기억하는 일화중의 하나로 동료 중 한명이 의사가 환자의 수액이 뭐 들어가냐고 영어로 물었을 때, 그 선배는 당당하게 "오펠센트 디에스 오백씨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의사가 "What? say again"이라고 웃으며 말했을때 그 동료는 똑같은 대답을 다시 한 번 더 했다. 그녀는 자신이 영어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던 것이다. 그 의사가 "say English"라고 했을 때 그녀는 나를 보며 "나 영어 하지 않았니?"라고 했다. 우린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웃었다. 그렇게 어중간한 영어와 어중간한 아라빅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액팅을 하다가 6개월이 지나면서 챠트를 보게되어 인계를 하게되었다. 한국어로 하는 인계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그 당시 서울대병원의 시스템으로 진행된 챠지트레이닝은 약간의 태움과 많은 가르침의 중간쯤으로 나에게는 신입 간호사로써 살아남기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약간의 행운이 함께하여 선배들에게 이쁨을 받으면서 이것 저것 많이 배웠다. 의학 지식뿐아니라 직장인, 사회인으로 살아남는 법까지 배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것에 더하여 챠트를 보게되면 의사들과의 의사소통도 원활해야하기에 짧은 영어로는 의학영어 알아듣는 정도밖에 되지않아 동기들은 따로 모여 영어 스타디를 하게 되었다. 첫날 우린 서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20여분을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시작부터 영어로만 이야기하기가 주제였기에...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하나씩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고, 서툴지만 노력하였기에 의사들과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였다. 팁으로 연애를 하면 영어가 는다. 확실히 는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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