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니야 Sep 03. 2023

내 인생의 음악

어느날 우연히 100년전 팝송을 들었다.

  며칠전 우연히 1920년대 미국음악(팝송)을 듣게 되었다. 지금이 2023년이니 1920년대이면 100년전 이야기이다. 100년전 음악을 듣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다 문득, 100년전의 철학자인 하이데거와 문학사에서 빠뜨릴 수없는 인물인 발트 벤야민을 떠올렸다. 그들의 저서를 우리는 고전이라한다. 그러나 100년전의 대중음악을 우린 '고전'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200년전의 유럽의 대중음악은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바흐, 베토벤, 모짜르트를 듣는다. 하지만 100년전 미국의 대중음악인 째즈는? 

나의 음악지식이 짧아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직 난 1920년대 미국 대중음악이 클래식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100년전 프랑스의 대중음악도 오래된 샹송이지 클래식은 아니다. 이런 생각이 하찮을 수도 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우리가 즐겨 들었던 음악들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사후에도 들려질 수 있을까? 

  난 1960년대에 태어나서 1970년대 김추자와 정훈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래 잘한다는 생각을 했고, 최희준과 현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에 저렇게 노래하는 목소리는 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트윈폴리오로 대표되는 포크송을 알게되었다. 그 즈음의 드라마는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소머즈'였고 그렇게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팝송이라는 미국음악을 간간히 접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빠지게 되었으나 그가 이미 죽은 뒤라는 것을 알게되어 상당히 유감이었다. 그때 나는 죽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모짜르트나 베토벤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걸치면서 유행을 알게되었고 통기타와 함께 노래하는 양희은과 남궁옥분, 임지훈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음악을 서서히 접하게 되었다. 

  내 어린시절의 음악들은 엘비스와 아바로 대변되는 팝송이었고, 20대가 되면서 친구가 좋아하던 락을 접하면서 퀸과 닥터훅, 알이오스피드웨건, 비지스를 알게되었다. 그런 20대에 히피와 보헤미언을 동경하며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기도 했었다. 단지 팝송을 들으면서 말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는 외국에 근무하는 환경 때문에 아랍음악과 인도음악들로 대변되는 제3세계 음악들을 들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영어노래는 브릭팝을 들었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한국 대중가요를 들었다. 그시절 좋아했던 알이에프, 영턱스클럽, 디제이디오씨 등등이 있다. 서태지로 대변되는 1980년대 후반의 한국 대중가요는 나와 인연이 아니었던 듯 서태지는 나의 귀국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렇게 서태지와 심신의 음악은 나의 열렬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후 간간히 접하게된 것이 전부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대중가요는 아이돌이라는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테레비젼을 점령하면서 나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게되었지만 엄정화, 이문세, 신승훈은 여전히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2010년대는 댄스음악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지만 나의 시간들은 별일없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육아와 관련된 동요와 어린이 프로에 나오는 음악들을 듣게 되었다. 난 그때 한국어, 일본어, 영어의 3개 국어의 동요를 들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3개 국어 자장가는 아이들을 위해 불러주었었지만 지금 내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한다(ㅜㅠ). 

  2020년대인 지금은, 현재 유행하는 음악도 듣지만 나이가 들어버린 나의 청력이 락킹하고 빠른 음악보다는 발라디하고 느린 음악을 선호한다. 젊었을때 내가 듣던 락음악이 시끄럽다고한 선배가 가끔 기억난다. 그때 그 선배도 지금 내가 느끼듯이 귀가 편안한 음악을 듣고 싶었던터였을 것이다. 그래도 클래식은 시끄러운 심포니나 행진곡을 듣기도 하지만 현악기가 주가되는 음악을 선호한다. 피아노곡도 좋아하지만 가끔 내 두뇌를 내리치는 느낌이 들어 피아노곡은 선호하지 않는다. 


  우연히 듣게된 1920년대 미국음악이 내가 살아오면서 들었던 모든 음악들을 상기하게 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오늘의 음악은 우연히도 나에게 찾아와 나와 함께 했던 음악들과 나의 어린시절을 회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음악을 즐겨듣기는 했지만 음악과 연관되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곰곰히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음악이 함께하는 시간들이 있었고, 여전히 나는 음악을 듣고 있다. 그것이 대중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성악곡이든 상관없이 나는 듣고 있다. 심지어 음악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좋아한다. 예전에 K팝스타, 슈퍼스타K 뿐만 아니라 슈퍼밴드, 심지어 히든싱어, 너목보도 즐겨보고 최근에는 남성 사중찬단을 뽑는 펜텀싱어까지 보았다. 그런것보면 나도 음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음악은 나에게 공간을 채워주는 소음이자 안정이다. 지난해부터 잠을 자기위해 수면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음악은 더욱 더 내 시간을 채워주고 있다.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특히 고음 발성이 안되기에 여자이면서도 남성의 키로 노래를 한다. 노래는 좋아하는 것과 잘 부르는 장르가 다르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 노래방에서의 열창은 없다. 그냥 즐겨부르는 노래를 즐길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 음악을 듣는것은 다른 일인듯하다. 나에게는 음악과 노래가 같은 것이 아니다. 난 노래를 잘 하지 못해도 음악을 잘 듣는 사람이다. 음악은 시간들을 감상적이고 풍부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Sep-03. 2023

매거진의 이전글 2023년은 나에게 새로운 기회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