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깊숙이 내려앉은 우울함, 그리고 쓰디쓴 절망
우울함, 절망
나는 우울함과 절망의 본질적인 차이는, 오래된 상처의 흉터로 인한 고통이냐, 아니면 갓 새겨진 상처로 인한 고통이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우울한 감정은, 대개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된다. 그 상처는 사람을 조용히 움츠러들게 하고,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그 깊은 흉터가 곧 자신 전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수많은 측면 중 단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은 순간적으로 밀려와, 그 순간의 생생한 고통을 안긴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우울함과 절망, 이 두 감정은 모두 인간이 가장 힘들고 도망치고 싶을 때, 가장 깊은 내면의 심연에서부터 올라온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인간 실격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우울함과 절망은 성장에 있어 인간에게 필연적이자 필수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이 감정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건 인간으로서 실패한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실격당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비극적이다. 인간이 외부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실패자라거나 ‘실격’이라 부른다면, 그건 인간에게 너무 잔인한 해석이다.
인간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계속해서 그 고통의 상황을 학습하기 때문에, 그 속에 머무는 동안엔 오히려 그 고통이 무뎌진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는 순간, 되려 그 고통이 더 선명하고 날카롭게 다가올 수 있다.
이렇듯, 그 속에서 받은 상처들은 쉽게 없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그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이해가 돼. 그럼 이렇게 바꿔서 살아보면 되잖아?”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사실, 인간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찰나의 순간이다. 흔히 말해, 그 찰나는 그 인간의, 전체의, 떠다니는 빙산의 일각이다.
추락하는 자, 올라서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깊고 어두운 감정들 또한 인간다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감정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람의 모습에서 나는 가끔, 차마 아름답다고 말해도 되는지 망설여질 만큼의 절박함과 진실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이 두 가지 감정에 휩쓸려 무너지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딛고 천천히 올라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추락이라고 해서 모두 실패는 아니다.
어쩌면 어떤 이의 추락은, 한 봉우리를 힘겹게 올라갔다가 그곳이 자신의 ‘정상’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다시 발을 돌리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 아픔을 껴안고 다시 올라서는 사람은 자신만의 진짜 정상을 향해 다시 발을 딛는 여정을 시작한 사람일 것이다.
우울함과 절망의 이해, 공감
나는 이 글을, 절망과 우울함을 조용히 감당해 왔던 경험에 대해 스스로 되짚기 위한 마음으로 썼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힘들면 말해야 해. 도와달라고 해야 해.”
물론,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건, 그런 감정들은 말해보려는 순간조차,
자신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다고 해도 상대가 모두 이해해 주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말하지 못한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고통스럽고 우울한 찰나의 순간들을
공유할 수도 있겠지만,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또, 그 우울함을 또 다른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에게
선뜻 안겨주고 싶지 않다.
우리는 감정을 말함으로써 치유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기도 한다.
말함이 용기라면, 말하지 않음은 또 다른 형태의 용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