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김이 자욱한 욕실로 들어간다. 사자 발 같은 황동 받침대가 받치고 있는 고풍스러운 세라믹 욕조 안에는 따뜻한 물이 채워져 있다.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스르륵 들어간다. 물의 온도는 살갗보다 살짝 뜨거운 듯 딱 알맞으며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돌아 몸을 담그자마자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점점 더 깊숙이 몸을 담근다. 세포 하나하나, 혈관 구석구석까지 라벤더 향이 촘촘히 스며들더니 어느 순간 내 몸은 사라지고 보라색 꽃잎 하나만 욕조에 동동 떠 있다.’
그 꿈 때문이었을까. 먼 남쪽 지방에서 공연을 하고 돌아와 야릇한 꿈을 꾸고 깨어난 아침이었다. 언제나처럼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려는 순간, ‘컥컥’하는 괴물의 웃음소리 같은 게 툭 튀어나왔다. 예사롭지 않았다. 목감기 때 나는 쉰 목소리 정도가 아니었다. 일단 며칠 쉬어보기로 했다. 잡혀있던 스케줄 하나를 펑크 내고 일주일을 내리 쉬었다. 하지만 목 상태는 여전했고, 큰소리는커녕 모기 같은 작은 소리를 내는데도 목에 핏줄이 설 만큼 힘이 들어갔다. 일주일을 더 쉬어봤지만, 변함없었다. 할 수 없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용하다는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왼쪽 성대 근육에 심각하게 마비가 왔네요. 보통 갑상샘 수술 이후에나 발병하는데,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타나다니 참…. 하긴 바이러스성 전염이나 신경염, 혹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일시적일 수 있으니까 3개월 정도 경과를 보죠. 그래도 안 되면 약물 투입을 고려해 봅시다. 일단은 푹 쉬세요. 가능한 한 말하지 마시고, 물 많이 드시고.”
마치 끌려 나온 소개팅 자리에서 영혼 없는 자기소개를 하듯 메마르고 깔깔한 목소리로 병명과 병상을 읊어대는 의사의 말에 나는 못내 서러웠다. 나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딱 하늘을 칠 노릇이었다. 소리를 못 내는 가수라니, 노래를 못 하는 가수라니. 물론 티브이에 나오거나 음원사이트에 등수를 올리는 만큼 유명한 가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엄연히 노래를 불러서 생계를 유지하는 말 그대로 ‘나는 가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노래는커녕 말하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 버리다니.
병원을 다녀온 후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집에 갇혀 길고 긴 겨울을 지냈다. 손발이 묶인 채 하늘도 안 보이는 깊은 우물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눈을 뜨면 다시 눈을 감았고 감은 눈 그대로 하루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3개월이 거의 지났음에도 내 목소리는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그 사이 겨울은 갔고 창밖에 목련꽃이 하얗게 피었지만 나는 여전히 춥고 깊은 우물 속에서 더딘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탐스럽던 목련꽃이 추악하게 땅으로 떨어진 어느 날, 나는 할 일을 잃고 무료히 서 있는 기타를 바라보다가, 문득 성대마비가 오기 직전 마지막 공연을 했던 카페 체칠리아가 떠올랐다. 말총머리 주인아저씨와 그의 소녀 같은 부인 체칠리아가 운영하는 지리산 자락의 아담한 카페. 홍대에서 주로 공연하는 나를 어찌 알았는지 멀리서 공연 의뢰를 해주었고, 월세의 빠듯함에 힘겨워하던 나는 꽤 두둑한 공연비에 덥석 공연을 약속했었다. 그 공연을 끝으로 이제 노래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왠지 그곳에 가면 내 목소리의 여운만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봄비 내리는 J시의 기차역은 지난겨울 방문했을 때보다 더 스산했다. 황량한 벌판에 새로 지은 웅장한 역사만 덩그러니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역 앞 광장에 있는, 이식한 지 얼마 안 된 듯한 벚꽃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 허망하게 꽃잎을 떨구고 있었고, 나는 오랜만의 외출에 정신이 몽롱하여 한동안 떨어지는 꽃잎만 바라보았다. 카페 체칠리아는 이곳 J시에서도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S군에 있어서 공연 때는 말총머리 카페 주인아저씨가 마중을 나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가야 하니 불안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써먹지 않아 뻣뻣해진 내 몸의 관절들이 제대로 움직여줄지 걱정스러웠다.
막상 S군에 도착하고 보니 더 막막했다. 카페 체칠리아가 S군의 S면이라는 것만 알 뿐 정확한 정보가 내게 없었다. SNS를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고, 포털 사이트에는 미국 뉴멕시코에 있는 타코 파는 카페 체칠리아의 모습만 몇 장 보일 뿐이었다. 받았던 이메일 주소로 메일도 써보았지만, 답장은커녕 수신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우산을 받치고 터벅터벅 읍내를 하릴없이 걷다가 우연히 눈에 띈 ‘빛다방’이란 곳으로 들어갔다.
과연 ‘빛’ 다방이었다. 벽면 가득 갖가지 등불이 밝히고 있는 곳. 창문 하나 없는 깜깜한 카페 안은 희끄무레한 등불들의 군무가 몽환적이었고, 강렬하게 흐르는 파두의 슬픈 멜로디가 파도치듯 일렁이고 있었다. 긴 생머리의 창백한 낯빛의 주인 여자가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는 메뉴판에서 ‘아메리카노와 카스텔라 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그녀는 잠시 후 그것들을 내 앞에 차려 놓았다. 제법 허기졌던 터라 허겁지겁 먹고는 정신을 차려보니,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 여자의 실루엣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가 ‘카페 체칠리아를 아시나요?’라고 적은 핸드폰 메모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가만히 끄덕했다. 다시 ‘어디 있어요?’라고 급히 찍어 보여 주었다. 그녀는 다시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맞다! 그녀는 분명 그날 공연을 보러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날의 관객은 겨우 스무 명 남짓이라 그녀와 공연 중에 몇 번 눈을 마주친 기억이 있다.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차분히 외투와 가방을 챙겨 앞장섰다.
천정이 비 새는 벽지처럼 구불구불 내려앉은 그녀의 작고 낡은 자동차는 비를 뚫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를 좁고 위험한 길을 그녀는 침착하고 날렵하게 운전했고, 나는 말없이, 아니 말 못 하고 가방만 움켜쥔 채 와이퍼가 오락가락 손 흔드는 모습만 응시했다. 이윽고 차가 멈추었고, 전조등의 환한 불빛 앞에 카페 체칠리아가 마치 검은 호수에 떠 있는 섬처럼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말총머리 주인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그는 아주 행복한 듯 깊은 보조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하고는 자리를 안내했다. 빛다방의 그녀도 내 옆에 와 앉았다. 이제 막 공연이 시작되려는 듯 이미 자리를 잡은 손님들은 다들 무대 쪽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 한 여자가 등장했다. 체칠리아였다. 그녀는 라벤더 꽃잎 같은 보라색 기타를 안고 노래를 시작했다. 깊은 곳에서 먹물처럼 새어 나오는 아름다운 고음, 발레리나의 춤 같은 우아한 리듬. 겹겹이 쌓아가는 매력적인 음색. 소녀처럼 수줍게 이야기하던 체칠리아에게서 저런 울림 깊은 목소리가 숨어있었다니 의외였다. 그런데 가만! 저 목소리는, 저 목소리는 내 것이었는데, 내 목소리였는데! 나는 벌떡 일어나 “저 목소리는 내 것이었어! 저건 내 목소리였다고!”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내게선 컥컥대는 괴물 같은 소리만 작게 튀어나올 뿐, 그마저도 체칠리아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묻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푸르락누르락한 얼굴로 빛다방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빛의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더니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들어 입에 갖다 대며 말했다. “ㅋ…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