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이에요, 그거”
한 달 넘게 그치지 않는 나의 잔기침을 듣고 류가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류의 눈빛은 흐리멍덩. 이렇게 눈빛이 흐린 날일수록 류의 언어는 오히려 날카롭다. 정조준된 화살처럼 과녁 한가운데 팍 꽂힌다.
가끔 류의 눈동자가 또렷한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오히려 주변에 관심이 없다.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여 무언가를 쫓는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웹 서핑을 하거나. 진지한 류의 눈빛에 의연함마저 느껴질 때도 있다.
오늘 류는 예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커‥피‥ 젤‥리‥ 주‥세‥ 요‥’라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듯 주문했다. 류는 언제나 커피 젤리를 주문한다. 그녀 말고는 주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메뉴에서 뺄까, 말까 언제나 고심하지만 단골인 류의 기호를 무시할 수가 없다.
류가 커피 젤리를 먹는 순서는 이러하다. 먼저 세 스푼 정도 커피 젤리만 떠서 먹는다. 쌉싸름한 맛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릇을 살랑살랑 흔들며 젤리의 탱글탱글한 탄성에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연유 시럽을 삼분의 일 정도 흘려 넣어 잠시 스며드는 모양을 본다.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서 서너 스푼 음미한다. 남은 삼분의 이의 연유 시럽을 마저 붓는다. 티스푼으로 커피 젤리와 연유가 섞이도록 젓는다. 한 스푼씩 천천히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두 번에 한 번은 눈을 감고 먹는다. ‘먹는다’가 아니라 ‘담는다’는 느낌이다. 커피 젤리는 류의 입이 아니라 류의 심장에 차곡차곡 담긴다.
지난봄 눈이 흐리멍덩했던 어느 날, 바에 앉은 류는 커피 젤리를 한입 떠먹으며 달팽이처럼, 그러나 날카로운 화살처럼 입을 뗐다. “두‥ 사‥ 람‥ 사‥ 귀‥ 죠‥?”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웅은 갑자기 딸꾹질을 해댔고, 나는 씻고 있던 물컵을 떨어뜨렸다. 사실 웅은 손님으로 드나들다 나의 비밀 연인이 된 지 서너 달 된 터였다. ‘비밀’ 연인이라 함은 그에게는 아내도, 예쁜 두 딸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웅는 가족과 헤어질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으니, 웅와 나는 세상에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음지의 연인일 뿐이었다. “그럴 리가요.” 내가 소심하게 부정을 해보았지만, 류는 대답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무심하게 읽고 있던 책에 다시 코를 박았다.
그날 이후 웅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누군가에게 발각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두려운 듯 가끔 오더라도 류가 없는지 반드시 확인했다. 어쩌다 카페로 들어오는 류와 마주치는 날이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점점 심야의 데이트도 심드렁해졌다.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에도 힘이 빠졌다. 그렇게 서서히, 서서히 웅은 내게서 떠났다.
늘 감정이 한 발 느린 나는 웅이 연락을 끊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별을 깨달았다. 가슴에 화끈화끈 불이 났다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아팠다. 웅은 마치 허깨비처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가슴에 모래바람이 이는 듯 허무했다. 나와 웅과 류가 알고 있던 비밀의 정원에서 웅 혼자 흔적 없이 사라졌고 이제 류와 나,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나의 잔기침이 시작되었다.
잔기침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건지, 가슴이 아파서 잔기침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고 자다가도 여러 번 깨어야 했다. 카페 문을 닫고 여러 병원을 전전해 보기도 했으나 다들 진단과 처방이 달랐다. 이비인후과에서는 성대가 과민해졌다고 했고, 내과에서는 위산 역류 때문이라고 했고, 정신과에서는 가벼운 스트레스성 발작일 거라며 저마다 처방전을 써주었다. 하루하루 힘겨웠지만 그래도 병도 익숙해지는지 나는 서서히 잔기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나갔다.
오늘도 류는 커피 젤리를 주문하며 달팽이처럼 그리고 화살처럼 내게 말했다. “화‥병‥이‥에‥요‥, 그거” 나는 화살 맞은 새처럼 파닥파닥 기침이 터져 나와 멈출 수 없었다. 배가 조이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커‥피‥ 젤‥리‥는‥ 연‥유‥와‥ 섞‥이‥지‥ 않‥아‥요‥. 아‥무‥리‥ 휘‥저‥어‥도‥” 류는 연유 시럽을 그대로 둔 채 느릿느릿 커피 젤리를 입에 넣었다. 미간을 한껏 찡그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