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왜 그렇게 쉽게 읽히는 걸까

엄마의 공부방 1 : 한글 이야기

by 여름하늘

나는 요즘 외국인에게 한글을 설명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정리하고 기록한다.




고(故) 박완서 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억척스럽지만 속 깊은 엄마가 딸에게 늘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세종대왕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창문을 보며 한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물론 사실 여부를 따지자면 근거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만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 모양을 떠올려 보자. 네모난 틀 안에 단순하고 분명한 선들.

자음 ‘ㅁ’, ‘ㅂ’, ‘ㅍ’, ‘ㅎ’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글자이다.


실제로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한글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즉, 그 소리를 낼 때의 입 모양이나 혀의 위치가 그대로 글자가 된 것이다.


기본이 되는 다섯 글자는 다음과 같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다. ‘그’를 발음해 보면 목 뒤쪽에서 막히는 느낌이 난다.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이다. ‘느’를 발음할 때 혀의 위치를 떠올려 보자.

ㅁ은 입을 다문 모양이다. ‘므’를 발음하면 입이 닫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ㅅ은 이의 모양을 본떴다. ‘스’를 발음할 때 이 사이로 공기가 지나간다.

ㅇ은 목구멍의 모양이다. ‘으’를 발음해 보면 소리가 목 안쪽에서 만들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기본 자음에 획을 더해 거센소리를 만들었다. ㅋ, ㅌ, ㅍ, ㅊ 같은 글자들은 기본 자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소리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ㄱ → ㅋ

ㄷ → ㅌ

ㅂ → ㅍ

ㅈ → ㅊ

‘그’에서 조금 더 세게 소리를 내 보면 ‘크’가 되고, ‘드’에서 ‘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시선을 조금 바깥으로 돌려 보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발로 땅을 한 번 밟아 보고,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한글 모음의 원리가 조금은 보인다.

하늘은 ●

땅은 ㅡ

사람은 ㅣ

이 세 가지가 한글 모음의 기본 요소이다. 단순하지만 꽤 철학적인 질서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중요한 건 땅과 하늘,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하여 여러 모음이 만들어진다.

ㅣ,ㅏ, ㅓ, ㅡ, ㅗ, ㅜ, ㅐ, ㅔ


이제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글자가 되는지 살펴보자.

한글은 영어처럼 a, b, c처럼 글자를 줄줄이 이어 쓰는 방식이 아니다. 자음과 모음을 서로 모아 하나의 글자를 만든다.


예를 들어

가 = ㄱ + ㅏ

감 = ㄱ + ㅏ + ㅁ

한글은 이렇게 소리, 즉 음절 단위로 글자를 만든다.

‘가’, ‘나’, ‘다’처럼 한 글자가 하나의 음절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규칙이 있다. 한 음절에는 반드시 모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보통은 자음과 모음이 함께 온다. 기본적으로,

초성 + 중성 (+ 종성)

가 = ㄱ + ㅏ

감 = ㄱ + ㅏ + ㅁ


그래서 모음으로 시작하는 소리도 사실은 이렇게 쓰인다.

아 = ㅇ + ㅏ

오 = ㅇ + ㅗ

여기서 ㅇ은 소리가 없는 자음이다. 그냥 맨 앞에는 자음이 들어가야 하니까 자음 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모음도 기본 소리에서 조금씩 확장된다. 기본 모음은

ㅣ, ㅏ, ㅓ

ㅡ, ㅗ, ㅜ

ㅐ, ㅔ


여기에 획이 하나 더해지거나 모음이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소리가 만들어진다.

ㅑ, ㅕ, ㅛ, ㅠ

ㅢ, ㅚ, ㅟ, ㅙ, ㅞ


자음 역시 비슷한 원리가 있다. 발음하는 입의 위치에 따라 비슷한 소리끼리 묶어 볼 수 있다.

ㅇ, ㅎ

ㅁ, ㅂ

ㄴ, ㄷ

ㄱ, ㄹ

ㅅ, ㅈ


그리고 같은 위치에서 소리를 조금 더 강하게 내면 새로운 자음이 된다.

ㅋ, ㅌ, ㅍ, ㅊ


또는 소리를 단단하게 긴장해서 발음하면 이와 같은 쌍 자음이 만들어진다

ㄲ, ㄸ, ㅃ, ㅆ, ㅉ


우리 집에는 한때 ‘꼬마 한글 문맹’이 한 명 있었다. 일곱 살쯤이었을까. 몇 달 동안 꽤 열심히 한글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가 한글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딘가 조금 달라 보였다.


예를 들어 ‘각’이라는 글자를 보면, 아이는 그것을 그냥 외우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마치 작은 계산을 하듯이 글자를 풀어 나갔다. 이렇게 말이다. ㄱ + ㅏ + ㄱ

먼저 ‘그’와 ‘아’를 붙여 ‘가’를 만들고, 거기에 다시 ‘ㄱ’ 소리를 붙여 ‘각’이 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실제로 ‘그’, ‘아’를 몇 번 반복하면 ‘가’ 소리가 만들어지고, 다시 ‘가’에 ‘악’을 붙여 몇 번 소리를 내 보면 ‘각’이 된다.


마치 머릿속에 작은 한글 공식이 하나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학 공식도 한 번 원리를 이해하면 오래도록 써먹을 수 있듯이, 한글 역시 그런 문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에게 한글을 설명하다 보면 가끔 그런 장면을 보게 된다. 몇 가지 원리와 몇 개의 단어만 알려 주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스스로 한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꽤 놀라운 장면처럼 느껴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한글은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문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종대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소리를 내는 방식, 글자를 배우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아주 단순한 원리 안에 담아 두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사람의 소리와 몸을 닮은 또 하나의 작은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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