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생 May 17. 2021

선언으로서 <노르웨이의 숲>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루키의 다른 작품과 달리 현실만을 담고 있기에, <노르웨이의 숲>은 보통 하루키 문학 세계의 조화를 깨는 이질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필자도 <노르웨이의 숲>이 독특하고 특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현실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노르웨이의 숲>을 작가의 선언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작품은 크게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기준으로 사회와 유리된 개인의 내면 묘사(디태치먼트)에 집중한 전기와 타인과의 연대, 사회에의 참여(커미트먼트)에 집중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시기로 보나 주제로 보나 전기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무 살 대학생 와타나베를 주인공으로 나오코, 미도리 등의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삶과 죽음이 대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분명 디태치먼트의 감수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성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회상을 통한 이야기 속 이야기로 제시된다. 이 점에 주목해보면, 성장한 화자에 의해 액자 구조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라며 주인공이 영원히 방황할 것처럼 작품이 끝나는 것은 이상하다. 이 위화감, ‘20년 후의 와타나베’와 ‘방황하는 와타나베’ 간 간격이 <노르웨이의 숲>을 선언으로 만든다. 


    서른일곱 살, ‘나(와타나베)’는 보잉 747기를 타고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18년 전,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편의상 전자의 와타나베를 와타나베_a, 후자의 와타나베를 와타나베_b라고 하자. 와타나베_b가 공중전화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묘사로 <노르웨이의 숲>은 끝난다. 반면 작품의 도입부는 와타나베_a가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이 ‘도착’과 ‘방황’ 사이의 간극은 무엇을 뜻할까?


자동차, 기차 등과 달리 비행기는 목적지만을 향해 가는 교통수단이다.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오로지 목적지를 향하는 비행기는 출발한 순간 도착이 결정된 상태다. 비행기에 탑승한 순간 승객은 이미 도착지에 도달해 있다. 즉 비행기는 도착지라는 ‘의미’를 항상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비행기 안에서는 공간이 없고 시간만이 존재한다. 비행기에 탄 승객은 도착지에 이미 와 있지만, 밖으로 나가려면 오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 일종의 기묘한 감옥에 갇힌 셈이다. 


반면 공중전화는 서로에게만 의미가 있는 타자와 타자를 이어주는 곳으로, 의미가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통화는 병렬적이며, 따라서 통일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곳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라는 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중전화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가 되고, 이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해 보아도 결코 알 수 없다. 와타나베_b가 공중전화에서 헤매는 장면은 무의미의 강렬한 나타남이다. 비행기 좌석, 의미의 감옥에 갇혀 있던 와타나베_a는 공항에 도착하자 풀려난다. 그리고 그 순간에 들려온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그리움은 의미로부터의 해방감과 더해져 의미 상실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 어느 곳도 아닌 장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모든 곳에 가득한 의미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이라는 읊조림은 와타나베_a가 추억이 되었기에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과거를 깊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제는 회상 속 이야기의 끝이 영원한 방황인 이유를 알 수 있다. ‘20년 후의 와타나베’와 ‘방황하는 와타나베’ 간 간격은 ‘의미’와 ‘무의미’의 간격과 같으며, 그 간격은 곧 의미 상실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회상은 기억의 재현이 아니기에, 그 그리움은 채워지지 못하고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이 간격은 <노르웨이의 숲>에 ‘디태치먼트’보다 많은 것이 담겨 있음을 알려준다. 이야기 속 이야기 구조로 하루키는 의미 상실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를 추억으로 여기는 것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의 자각과 동치이다. 돌아갈 수 있는 곳에 그리움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타난 ‘의미 상실’에 대한 ‘그리움’은 자신이 이미 ‘의미’의 편에 섰다는 것을, 개인의 내면 탐구(무의미)에서 개인과 개인의 연대(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노르웨이의 숲>은 디태치먼트에서 커미트먼트로의 변화가 처음 이루어진 은밀한 출발점이 된다. 디태치먼트와의 결별, 그리고 커미트먼트로의 이행. 이것이 <노르웨이의 숲>에 하루키가 퍼즐처럼 숨겨둔 선언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현실만을 다룬다는 이유로 하루키답지 않은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숨겨진 퍼즐에 집중한다면, <노르웨이의 숲>을 디태치먼트에서 커미트먼트로의 전환을 다짐하는 작가의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조용한 선언이야말로 가장 하루키다운 것이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숲>을 가장 하루키다운 작품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참고문헌: 조주희,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문학 연구 (서울: 제이앤씨, 2011)
          




작가의 이전글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