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은 나보다 10배는 더 많은 책을 읽었고, 나보다 100배는 더 많이 문학에 관해 생각해온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정지돈에 대해 생각해왔던 모든 것을 폐기했다. 내가 그의 소설을 '비평'하고자 하는 모든 관점을 그는 선취하고 있었다. 아는 것을 또 말하는 것은 재미없잖아? 그러니 영도에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언젠가 정지돈 비평을 발표하게 된다면, 그 글의 제목은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문학)>이 될 것이다. 내용은 21세기 K - 플라뇌르(!)인 그가 어떻게 문학을 거닐며 텍스트를 구별하고 선택해 제목을 단 후 작품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그 난파선을 구경꾼인 우리는 어떻게 보게 되며, 이것이 어떻게 데리다가 <기하학의 기원> 서설에서 말한 '기원'(보편적이면서 편향적인 선취)의 문제, 또 크립키를 계승한 가라타니 고진의 '고유명'에 관한 사유와 연결되는지가 될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정지돈 비평'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행위는 곧 내가 문학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것과 같으며, 정지돈 비평이 완성되는 날은 내 첫 소설이 완성되는 날이기도 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라는 후장사실주의의 강령을 메시아처럼 따라가며 문학의 구원을 희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원은 없을 것이며, 종언은 영원히 지연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