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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생 Aug 17. 2022

비밀의 취향


데리다가 자신의 친구인 페라리스, 바티모와 대담한 기록을 엮은 책이다. 소실되었다가 데리다 전기 작가에 의해 겨우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흥미롭다. 대담자인 페라리스는 가브리엘 마르쿠스와 함께 신실재론(새로운 실재론)을 이끄는 철학자고, 바티모도 유명한 철학자인 것 같지만 나는 잘 모른다. 

대담은 총 여섯 번 이루어졌다. 바티모는 마지막 대담 때만 참가한다. 대담은 페라리스가 간략히 묻고 데리다가 길게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화두가 된 건 데리다의 주요한 철학적 테마인 보편과 특수가 관계 맞는 방식과 그 관계항들의 다양한 변주 양상(증언, 비밀, 철학과 문학 등)이었다. 

그 변주 중 <비밀의 취향>의 독자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건 어쩌면 '비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우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비밀의 취향'이라는, 책의 제목 때문이다. 왜 그런지 책을 조금 살펴보자. 

"제가 모든 것을 언술할 수 있었다고 해도 어떤 잔여가 있습니다. 그 잔여는 저의 대체 불가능한 독특성이고, 그게 무엇이 됐든 제가 감추려고 하는 것과 무관하게 비밀인 그런 것입니다." 106p

"모든 타자가 전적으로 다르다는 데 동의하고 거기서 출발할 때 생기는 차이는 기껏해야 쟁의가 - 따라서 전쟁과 논쟁들이 - 가능하다는 것, 나아가 불가피해진다는 것 정도뿐이죠." 110p

"저는 그 유사성으로 인해 비밀이 아닌 것보다는 비밀을 선호하게 됐습니다. 공적인 발화, 전시, 현상성보다 비밀을 더 좋아하게 됐죠. 제겐 비밀의 취향이 있습니다." 111p

이 미묘한 구절은, 역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정에는 확고하고 필연적인 토대가 없다는 진리를 뻔히 알지라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 우정의 윤리이다. "솔직함에는 '비밀의 취향'으로서의 우정과 본질적으로 대척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즉, 이 책은 그 무엇보다 '비밀의 취향'을 지닌 데리다가 그 취향을 발휘한 생생한 기록으로서 가치를 갖는 셈이다.


나를 지금까지 줄곧 괴롭혀 온 '인생의 화두'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정'일 것이다. 나에게는 태생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얕은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면이 있는 것일까? 데리다라면 이 '면'을 '취향'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에게 '비밀의 취향'이 있다면, 나에게는 '깊이에의 취향'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깊이'는 '비밀'의 공간적인 은유로서 작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달하기 어려운, 아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밀한 무언가. 결단력 있는 탐험가만이 발견할 수 있는 '비밀'. 데리다가 말하는 '비밀'은 심지어 밝힐 수조차 없는 아주 은폐된 것이라는 점에서, 무한히 초월적인 깊이, 원근법적 상징형식의 소실점 너머에 있는 무언가로서 '비밀'은 '깊이를 넘어선 깊이', 즉 깊이 그 자체다. 아니, 깊이보다 깊-이 들어간, 지하 1층 아래의 지하 n(2, 3, ... x)층이다.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 아마 나는, 그리고 '비밀의 취향'을 가진 이 모두, 데리다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리다에 관심 있다면, 그의 독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비망록, 자서전, 대담집, 그리고 무엇보다 취향의 기록인 이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친우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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