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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생 Aug 17. 2022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이 책이 제안하는 것은 '애도의 애도'다. 애도의 애도란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을 비판하면서 데리다가 제안한 것으로, 한마디로 이렇다 - 주체를 유지하면서도 타자에 충실하기. 왜 애도의 애도가 필요한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90년대 초 우리나라의 마르크스주의는 큰 위기에 처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대체품으로서 각종 포스트 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이 수입되었다. 포스트 담론의 추종자는 마르크스주의를 너무 섣불리 기억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애도에 실패했다. 한편으로 한 줌의 마르크스주의자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채 우울증에 빠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불모의 지적 토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애도의 애도가 필요하다. 즉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주체(우리 고유의 맥락)를 유지하면서도 타자(마르크스주의, 프랑스 철학, 혹은 앞으로 수입될 많은 이론)에 충실하기.



좋아, ‘애도의 애도’가 필요하겠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을 수행할 수 있을까? 빨리 저자의 다음 책에서 구체적인 적용을 보고 싶군…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한 놀라운 사실. 이 책은 애도의 애도에 대한 권유이면서, 또한 애도의 애도 작업의 사례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지성계의 간략한 역사: 80년대와 90년대의 민중 민족 담론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애도로서 90년대부터의 포스트 담론. 이들에 대한 애도는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고, 그러므로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의 목차가 세 개의 부로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포스트 담론 이후’, ‘민족 공동체의 탈구축’,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이라는 세 개의 부는 각각 포스트 담론, 민중 민족 담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애도의 애도를 수행한다. 이제 각각의 부에서 애도의 애도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미리 말하자면,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는 모범 사례집이다.



1부 '포스트 담론 이후'에서는 포스트 담론의 애도의 애도가 이루어진다. 이 작업은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의 필요성'이라는 은밀한 주제 위에서 수행된다. 세 가지의 논점: 첫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도 작업으로서 성급한 포스트 담론의 수용이라는 우리나라의 지적 역사 파악하기. 그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 담론의 행복한 결합의 가능성이 안타깝게도 사라졌다. 한편, 미국에서 가공된 프랑스 철학이라는 포스트 담론의 맥락 또한 이해해야 한다. 둘째,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포스트 담론의 문제 제기를 봉쇄하는 지젝, 바디우, 아감벤과 같은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가들의 정치적 불모성을 인식하기. 셋째, 벤야민 – 좌파 메시아주의의 ‘신적 폭력’ 대신,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즉 유사초월론에 기반해 정의와 법을 사유하기.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적 정치의 필요성, 또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정치의 필요성"을 촉구하기. 이로써 문제 설정, 우회, 그리고 전면전이라는 세 가지 도구를 통해 포스트 담론의 애도의 애도가 수행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떤 질문과 대답. Q)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이 필요한가? A) 좌파 메시아주의는 가망이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보지 못하는 것을 포스트 담론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둘의 결합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가 친화적이지 않다는 '통념'은 90년대 초 포스트 담론에 의한  잘못된 애도에 의해 생긴 오해이다. 따라서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은 과거 애도가 잘 수행되었을 경우 어쩌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결과이며, 이미 어긋난 지금 상황에서는 애도의 애도를 통해서 비로소 사유할 수 있게 된 주제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2부는 ‘민족 공동체의 탈구축'이며, 민중 민족 담론에 대한 애도의 애도 작업이 수행된다. 여기에서의 논점 또한 세 가지다: 첫째, 유사 파시즘 체제로서 국민국가를 바라보는 대신, 푸코 – 알튀세르 혹은 발리바르를 따라 평등 - 자유 명제에 기반한 보편적이고 해방적인 잠재력을 가진 정치체로서 국민국가를 사유하기. 둘째, ‘nation state’의 번역어로 ‘민족국가’ 대신 ‘국민국가’를 채택하기. 이를 통해 우리는 부정적인, 전근대적인 현상으로서 ‘민족주의’ 대신, 모든 국민국가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이데올로기로서 ‘국민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위의 논의를 기반으로 "그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상상의 공동체"를 사유하기. 즉 '을 중의 을'을 위한 새로운 정치체를 구축하기. 2부는 세련된 형태로 민중 민족 담론을 탈구축하면서, 동시에 저자의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은 국민국가의 밖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발리바르가,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시민권이 인권에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정치 담론에 입각해서는 재현되지 못하는, 배제되는 약소자를 제대로 고려할 수 없다. 따라서 무한소급되는 ‘을’들, 몫 없는 자의 몫을 위한 ‘을의 민주주의’에 입각한 탈구축적인 정치체의 구축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느새 ‘을의 민주주의’까지 도달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정치적 대안인 ‘을의 민주주의’는,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보다 앞서 출간된 <을의 민주주의>에서 상세하게 논의된 바 있다. 하지만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가 <을의 민주주의>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만큼, 우리는 저자가 통과한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이라는 경로가 어떻게 하여 을의 민주주의에 다다랐는지 그 실마리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면모는 3부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3부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도의 애도를 수행한다. 3부가 책의 핵심으로 보인다면, 정확하다. 이는 애초에 (포스트 담론의) 애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마르크스주의이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도의 애도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도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이해된 포스트 담론’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평가하는 형태를 불가피하게 띨 것이며, 결과적으로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밝힌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의 필요성은 마르크스주의의 애도의 애도의 필요성과 사실상 같은 말이다. 역시 세 가지의 논점: 첫째, 흔히 마르크스주의의 대립자로 알려진 푸코의 권력 분석을 받아들여 마르크스주의를 확장하기. 특히 함께 주체화/예속화 쌍을 고민한 사상가로서, 알튀세르와 푸코를 함께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알튀세르의 통찰을 발전시켜 ‘최종 심급에서 경제 결정’이라는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을 버리고, 다양한 모순을 함께 사유하기. 즉, 사회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기.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논점인데, 마르크스주의의 이론 내적인 한계를 인식하기. 앞서 이야기한 푸코의 통찰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서 제기된다.  이 논점들을 통해, 특히 세 번째 논점을 통해 밝혀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착취 개념은 경제를 사유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그 정의 자체로 인해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에 종사하는 주체(여성, 이주민, 소수자)의 ‘착취’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로 하여금 착취뿐만 아니라 낸시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보이지 않는 착취로서 수탈/비전유(expropriation)를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수탈/비전유되는 ‘을’들의 리프리젠테이션 문제로 이어진다. 정치적 대표의 존재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구성하며, 또한 대표로 인해 정치에서 배제된 주체가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서 인식된다는 해석이 최근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착취 – 배제 – 리프리젠테이션의 개념쌍은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착취, 그리고 그로 인해 배제되고 대표되지 못하는 주체까지 고려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개념쌍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권력을 포착할 수 있는 푸코 등의 포스트 담론의 수용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착취 – 배제 – 리프리젠테이션을 사유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것이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쓸모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을의 민주주의'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를 통해, 우리는 애도의 애도를 수행했다. 의식을 마친 우리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포스트 담론도 아니고, 민중 민족 담론도 아닌, 그 모두가 (탈)구축된 어떤 ‘괴물’, 그러나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그 흉측한 몸에 기대야 할 그런 괴물의 씨앗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씨앗이 자라기를 기다릴 시간이 과연 주어져 있는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새로운 이론, 즉 포스트휴머니즘, 객체 지향 존재론, 신유물론 등이  쏟아지듯 수입되는 지금 우리는 손에 담긴 이 씨앗을 버리고 새로운 열매를 잡으러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새로운 이론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으로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의 역할은 끝난 것 같다. 미래는 당신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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