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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연 Oct 19. 2024

안부의 출처

5

  선영이 마지막으로 소개팅해 준 남자는 ROTC 소속이었다. 카페에 먼저 도착해 있던 남자는 키가 컸고 짧은 머리에 이마가 반듯했다.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깨닫게 됐다. 그동안 나는 소개팅에서 남자를 만나도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ROTC 남자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자 지금껏 소개팅에서 나는 뭔가 좀 애매하다는 느낌만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앉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이라고 해서 내 태도가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다. 다만 내 손바닥 위에 얹혀 있는 게 달랐다. 그건 상대도 날 마음에 들어 할까 하는 초조함이었다.

  그와 나는 소개팅 후로도 만났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파스타를 먹고 삼청동을 걸었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영화를 보고 술을 마셨다. 그날 나는 제법 맥주를 마셨다. 억지로라도 마시면 느는 건지 이상하게 술이 잘 들어갔다. 아무래도 계기가 생기지, 계기가. 속으로 주문을 외웠던 것도 같다. 술집을 나오는데 바닥이 빙글 돌았다. 어지러움을 견디며 걷다가 도착한 곳은 모텔 앞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자는 많이 어지럽냐고 물으며 내 어깨를 감싸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남자의 체취가 물씬 풍겨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누워있었고 남자의 두 손은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순간 몸이 빳빳이 굳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린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어쩜 이게 바로 사귀자는 말인가? 그런 건가? 그래도 나는 처음인데, 이걸 그냥 이렇게 해버려도 되나? 이런 생각에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씹었다. 옷이 벗겨질수록 점점 더 뻣뻣해지는 내 몸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더듬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싫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과연 해도 되는 걸까,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내 고민은 이제 그런 것으로 넘어가 있었고 그러는 사이 남자는 몸을 일으켜 뒤돌아 앉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모아쥔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있던 남자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나가자.”

  그때까지 꼼짝 안 하고 누워있던 나는 일어나 근처에 흩어져 있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옷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갑자기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방도 나도 모두 가짜 같았다. 진짜 나는 서둘러 옷에 팔다리를 꿰어 넣는 몸뚱이를 티브이 화면으로 보며 비웃고 있을 것 같았다. 옷을 다 입은 몸뚱이는 방을 나와 앞장서 걸어가는 남자 뒤를 걸어갔다. 모텔 밖으로 나온 남자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뒤에 서 있는 내게 고개를 반쯤 돌려 잘 들어가라고 말한 뒤 골목 저편으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모텔 앞에 서 있었다. 골목 바닥에 모텔의 네온사인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길바닥의 색이 조금씩 변하면서 울퉁불퉁 솟아오르고 가라앉고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담벼락쪽으로 몸을 옮기는데 발이 꼬였다. 더러운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서 허공을 바라봤다. 하루살이 떼가 얼굴 앞에 몰려들었다. 손을 저어 내쫓았다. 다시 고개를 드니 건물과 건물 사이로 무섭도록 깨끗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대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왜 이래, 창피하게. 뭐 어때, 괜찮아.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알지 못하는 이들의 대화를 따라 했다. 왜 이래, 창피하게. 뭐 어때, 괜찮아. 속이 울렁거렸다. 허리를 굽히자, 안에 든 것이 모조리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그 후로 ROTC 남자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도 연락하지 않았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선영과의 연락도 뜸해졌다. 졸업 후 나는 남자를 한 명 사귀었다. 통역 스터디 모임에서 만난 사람으로 나보다 두 살 많았고 일 년 반 정도 사귀었는데 그중에 오 개월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소개팅, 몇 번의 데이트, 다시 소개팅을 반복했다. 한번은 회사 동료에게 이러다 나 소개팅의 달인 되겠어,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동료는 소개팅의 달인이라면 소개팅해서 잘 돼야지, 잘 안돼서 많이 하기만 하는 게 무슨 달인이냐고 했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소개팅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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