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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연 Oct 19. 2024

안부의 출처

4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한 사람은 선영과 나뿐이었다. 사실 선영과 나는 어울리는 무리에 함께 속해 있긴 했어도 많이 친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낯선 서울에 둘만 가게 되자 서로가 각별해졌다. 학교는 달라도 30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던 우리는 자주 만났다. 은근히 체면을 차리게 되는 대학 친구들을 만나다가 선영을 만나면 허물없이 편했다. 여대에 간 나는 세련되고 화려한 여학생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곤 했다. 선영과 나는 만나서 주로 쇼핑을 했다. 우리는 좀 더 싸고 좀 더 예쁜 옷을 고르기 위해 명동과 동대문을 하루 종일 누볐다. 쇼핑 후에는 선영의 남자친구를 함께 만나기도 했다. 선영의 남자친구는 자주 바뀌었다. 남자친구들은 각기 개성적이었다. 덩치가 크고 무뚝뚝한 사람, 창백한 얼굴에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 수다스럽고 활달한 사람 사이에서 선영의 일관된 취향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친구들보다 인상적인 건 그들과 함께 있을 때의 선영의 모습이었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며 똑 부러지게 상대를 대하면서도 어딘지 나른하고 느슨해 보이는 태도와 표정에서 뭐랄까, 노련함과 성숙함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영이 또래 친구가 아닌 언니처럼 느껴졌다. 그런 선영의 모습에 나는 초조해졌다. 

  “야, 난 여중에 여고에 여대에, 이러다 평생 아무도 못 만나는 거 아니겠지?”

  여대 특성상 미팅과 소개팅이 자주 성사되긴 했다. 하지만 좀처럼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다려봐. 이 언니가 해결해 줄게.”

  선영은 정말로 두 팔을 걷어붙여 보였다. 나는 선영이 해주는 소개팅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모두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선영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한 날 쇼핑하다가 카페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고 있을 때 선영이 말했다.

  “이상하다, 너 정도면 괜찮은데.”

  나는 목을 빼고 나를 들여다보는 선영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네가 봐서 괜찮으면 뭐 하냐고.”

  “네가 술을 못 마셔서 그런가. 그래서 뭐가 진전이 안 되나?”

  “술을 마시면 뭐가 좀 돼?”

  “아무래도 계기가 생기지. 계기가.”

  나로서는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 오티에서 처음 술을 마셨을 때 나는 밤새도록 변기를 붙잡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아, 알겠다!”

  종아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던 선영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선영은 깜짝 놀란 나를 진정시키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너무 우유부단해.”

  “응?”

  “너 예전에 학교 앞 문구점에서 수첩 살 때 기억나니? 이 수첩은 너무 길어서 맘에 안 든다, 저 수첩은 표지가 튀어서 맘에 안 든다, 하면서 수첩 하나 고르는 데 삼십 분은 걸린 거?

  “아, 그랬지.”

  “뭐가 그랬지야. 지금도 그래, 너는. 치마 하나 고르는 데 무슨 고민과 생각이 그렇게 많니? 그러니 연애도 못 하는 거야. 깊이 생각하면 만날 사람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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