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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에 돌아와 한 시간을 더 잤다. 일어나서는 화장을 지우고 샤워하고 다시 화장을 했다. 오전 11시에 대전에서 사장을 만나 통역을 해야 했다. 사장은 바이러스로 불안한 시기이니 버스나 기차가 아닌 자동차로 움직여서 만나자고 했다. 중국인인 사장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회사가 한국에 진출한 지 4년째, 인사말 정도는 할 줄 알 텐데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량용 거치대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벨트를 맸다. 내비게이션에 미팅이 열리는 컨벤션 홀의 주소를 입력하자 화면 위로 길고 구불구불한 파란 선이 떠올랐다. 총거리는 173km, 예상 소요 시간은 2시간 32분.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고속도로 운전은 처음이었다.
지난해 삼촌이 타던 아반떼를 싼값에 넘겨받으며 운전을 시작했다. 보험 가입과 명의이전을 마친 차에 앉아 시동을 거는 데 공연히 벅차올랐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니, 비로소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인이 된 지 11년째 되는 해였지만, 나 자신을 어른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손목과 발목의 움직임만으로 이 묵직한 차체를 움직여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실감을 느낀 순간, 내가 가진 힘과 자유의 양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자, 차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차의 에너지와 속도가 마치 내 힘처럼 여겨졌다. 차의 모든 것이 내 통제하에 있었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이것 말고 다른 뭐가 있었던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언제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점도 좋았다. 차 안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세계와 나 사이에 경계가 생겨나며 안도감이 찾아왔다. 나는 잠시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위안이었다. 어릴 적에는 부모와 형제들을 피하고 싶을 때면 장롱 안에 들어갔었다. 차는 어른들의 장롱 같았다. 블랙박스를 새로 달면서 나는 자동차 선팅도 짙게 부탁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출퇴근 외에는 차를 거의 몰지 않았다. 차가 생기면 가보고 싶었던 곳들은 모두 고속도로를 타야 했고 고속도로 주행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속도로는 매일 지나는 출퇴근 길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접촉 사고와는 차원이 다른 사고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최고속도만 있는 게 아니라 최저속도가 있다는 사실도 무서웠다. 그건 내 마음대로 천천히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시내 주행에 충분히 익숙해졌으니 이제는 고속도로에 나가도 될 거라는 주위의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사고의 위험보다 감염의 위험이 더 커 보이는 상황이었다. 지난밤 나는 잠든 남자의 옆에 누워 핸드폰으로 고속도로 운전 요령을 검색했다. 1차로는 추월차선이라는, 3차로는 화물차 전용이라는, 졸리면 반드시 쉬어가라는, 터널 진입 시에는 서행하라는 이미 아는 내용들을 반복해 숙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