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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연 Oct 19. 2024

안부의 출처

3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길목에서 왼쪽 차선에 있던 회색 그랜저가 내 앞으로 끼어들려고 했다. 깜빡이는 없었다.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도로가 텅 비어있었다. 나는 그 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를 앞으로 바짝 몰았다. 그래도 자꾸 앞머리를 들이대는 차를 향해 경적을 울렸다. 그랜저가 주춤한 틈을 타서 얼른 액셀을 밟았다. 뒤에 저렇게 여유가 많은데도 꼭 앞에 끼어들려는 차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먼저 고속도로에 진입한 내 차 뒤로 회색 그랜저가 바짝 다가왔다. 내가 차선을 안쪽으로 이동하자 그랜저도 곧바로 이동했다. 의도를 가진 움직임이라는 걸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여차하면 칠 것처럼 그랜저는 내 뒤를 쫓았다. 백미러를 통해 운전자의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핸들을 세게 움켜쥐고 액셀을 힘주어 밟았다. 하지만 그랜저가 빨랐다. 그랜저는 곧 차선을 변경해 나를 앞지르더니 내 앞으로 급히 핸들을 돌렸다. 액셀에서 얼른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속도가 급격하게 줄면서 몸이 앞으로 쏠렸다. 등줄기에서 땀이 솟았다. 그랜저는 고의적으로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핸들을 잡은 손이 축축해졌고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는 발이 덜덜 떨리며 RPM 계기판의 바늘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랜저를 피해 2차선에서 3차선으로 차로를 변경했다. 하지만 그랜저는 이번에도 핸들을 꺾어 내 앞으로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부딪치지 않을 수 있었다. 불현듯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 그랜저를 박아버리고 싶다는 충동. 내게 돌아올 손해 따위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리고 싶다는 충동. 귀가 쾅 하는 파열음을 원하고 있었다. 터질듯한 충동에 눈앞이 아뜩해지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액셀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 오늘 하루 조심하라는 선영의 메시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발에 쥔 힘을 풀었다. 속도는 점점 내려가 고속도로 최저속도에 이르렀다. 그제야 그랜저는 분이 풀리는지 곧 속도를 높이며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저만치 앞서나간 그랜저가 갈림목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물을 끼얹듯 덮쳐온 위협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젖은 옷을 말리는 것처럼 시간이 걸렸다.

  나는 겨우 80킬로를 유지하며 2차로를 달렸다. 앞의 차가 천천히 가든 빠르게 가든 한 길만 달릴 생각이었다. 이런 내 차가 답답한지 뒤에 있던 차들이 나를 앞질러 휙휙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양옆으로 커다란 칼날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공기의 압력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공간이 약간 휘면서 차체가 그쪽으로 비스듬히 기우는 것도 같았다. 나는 이런 것이 신기했다. 서로 닿지 않고서도 물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주행 자체는 시내보다 쉬웠다. 앞으로 100km로 넘게 직진이었다. 길의 곡선에 따라 조금씩 핸들링을 하면서 일정한 세기로 액셀을 밟기만 하면 됐다. 별다른 주행의 변화 없이 계속 앞으로 달리기만 하니까 여전한 긴장 속에서도 머리가 멍해졌다. 머릿속 생각이 이리저리 샛길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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