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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Jan 01. 2024

암과의 숨바꼭질 2탄

"꼭꼭 숨어라!머리카락 보일라!"

나는 2020년 1월, 아이의 출산과 15cm가 넘는 암을 출산하며 그 해 격변이 흐르는 신년을 맞이했다.

대학병원 의사의 지시대로 개복수술 후, 25회에 걸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갓난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그 큰 일을 겪고 나서도 멈춤과 성찰의 시간 없이 살아온 방식과 습관대로 살며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신장을 하나 떼어내서 그런지 여러모로 신체적 역량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오래 쓴 휴대폰처럼 100% 충전을 했어도 순식간에 배터리가 닳아서 화면이 꺼져버렸다.

아이는 매 순간 나의 관심과 손길을 필요로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와 보낸 행복한 순간들이 숨 가쁘고 벅차게만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멈춤과 성찰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내게 그 시간이 가능했다고 치더라도 그 어린아이를 업고 나를 돌보면서 아이의 돌봄까지 감당해 내기엔 너무나 혹독한 업무량이었다.


나는 대기실에서 마주치는 소아암 환우들을 보곤 했다. '아줌마도 너무 힘들고 아파서 엉엉엉 많이 울었는데...... 저 작은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주책맞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곤 했다. 소아암 환우의 아이를 돌보는 엄마들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아픈 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어미의 고통은 어쩌면 당사자가 겪는 고통보다 더 뼈아프고 피가 마르는 고통일 것이라고.


나는 우리 아이를 키워내면서 힘이 들고 괴로울 때마다 다시 정신을 번쩍 차렸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예기치 못한 사건과 사고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언제든 내게도 예외일 수 없는 그런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마주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남아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아이는 어느새 걷고 뛰고 말도 하며 많은 성장을 하였다. 그 사이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이제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나도 그간 돌보지 못한 나의 건강을 살피고 여유를 찾아보자.'

나는 그간 잘 살피지 못한 나의 건강을 지금이라도 다시 잘 일으켜 세우고자 다짐을 했다.


2022년 여름부터 나의 몸은 또다시 안 좋은 신호들을 보냈다. 목, 어깨, 등 통증으로 일상생활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나는 아이를 안아줄 수도 없을 만큼 힘을 제대로 못 썼다. 밤에는 통증으로 잠을 못 자고 괴로워했다. 나는 겨우 5%의 배터리가 남아있는 상태로 아이를 돌보며 일상을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의 몸을 사용하게 되면 금방 화면이 꺼져버렸다.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 신호가 오면 덜컥 겁부터 났다. 한의원과 통증의학과를 번갈아 다녀도 크게 개선되는 점이 없었다. 통증의학과 원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깨에 힘줄이 끊겼고 물이 차고 석회성 건염으로 통증이 발생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를 안고 씻기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무리를 주고 목과 등통증으로 연결되어 등 전체가 아픈 것일 수 있다고 하였다. 몸을 그동안 쓰던 대로 막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당분간은 주사치료를 받고 아이를 들거나 힘이 드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라고 하였다. 한의원에서는 자세의 문제라고 하였다. 나는 그 모든 전문가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바른 자세로 힘이 드는 모든 행위는 자제하며 지냈다. 의사가 제안하는 비싼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으며 한의원에서는 침도 맞았다. 그렇게 조금 나아지는 듯했으나 크게 개선되는 점은 없었다.


2022년 9월 중순 경에 대학병원 정기 검진이 있었다. 나는 당시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았다. 기존에 진료를 받아왔던 김교수님께서 해외로 가시는 바람에 다른 교수님이 나를 담당해 주셨다. 새로 바뀐 교수님과의 첫 대면도 낯설었는데 결국 염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폐 우측 하엽 부분에 콩알만 한 종양이 있다는 진료였다. 나는 육종암 환우들이 대부분 폐전이에 취약하고 재발이 굉장히 잦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의사는 나의 흉부 CT 자료를 띄워놓고 바라보며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폐전이로 의심되는 콩알만 한 종양이 보이는데요,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데요...... 2개월에 한 번씩 추적 검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암은 크기나 양이나 기수와 큰 상관이 없는 악성의 혈관지방 육종이었다. 그 잔혹한 사실은 이미 그전 교수님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기존의 담당 주치의셨던 김교수님께서는 굳이 기수를 따지자면 2에서 3기라고 하셨다. '2 기면 2 기고 3 기면 3 기지 2에서 3기는 뭐람?' 그리고 덧붙이시길 "육종암은 악성 희귀 암이라 1기든 4기든 기수가 갖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암과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암은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집도의가 도려내고 고도의 첨단 의학 기술로 탄생한  방사선을 쪼여댔어도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암은 어딘가 꼭꼭 숨어있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암은 술래가 허술해지고 허약해졌을 때 "까꿍! 여기 있었지요~! 메롱~메롱~"하고 혓바닥을 날름 거리며 나타나는 것 같았다. 첫 게임에서는 출산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신장 쪽에서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나의 오른쪽 폐의 아래쪽에서 나타나서 나를 좌절시켰다. 암과의 숨바꼭질 2탄이 시작되었음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우리 집에는 큰 땅거미가 지는 듯한 슬픔에 휩싸였다. 가족들은 애써 아직 정확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무너져버린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날 위로했다.


가슴 졸이는 2개월을 보내고 추적검사 결과를 받으러 갔다. 주치의는 폐에 생긴 종양이 조금 커졌다며 수술할 것을 권유하였다. 수술 날짜가 신속히 잡혔고 흉부외과 교수님의 진료를 받으러 병원을 갔다. 대학병원 교수님들은 대수술을 밥 먹듯 집도한 탓인지 수술에 관하여 환자가 궁금해하고 따져 묻지 않는 한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과 안내가 없었다.


암과의 숨바꼭질 2탄에서는 1탄에 비하여 절망과 좌절이 더 컸지만 '현대의학'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 나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현대문명권에서 나고 자라면서 대학병원의 권위와 전문성에 뿌리 깊게 길들여져 있었고 세뇌되어 있던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부부도 결혼을 하고 3년이 지나면 콩깍지가 벗겨지듯이 나는 3년 차 암환우가 되면서 암과의 숨바꼭질 2탄을 찍을 때쯤부터는 대학병원과 전문가에 대한 맹신의 콩깍지가 벗겨졌다.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자 장님과도 같았던 내가 나의 소중한 생명을 담보하여 뭘 믿고 병원에만 의지하고 맡겨왔던 건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낯선 순간이 있었다.


나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무기력한 노예의 위치에 있었다. 나는 그간 치료를 위한 돈도 지불하고 시간도 지불하고 생명도 담보로 잡힌 채로 나의 모든 걸 시험대에 올려놓아야 하는 '을'의 위치에서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자유'조차도 박탈당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암과의 숨바꼭질 2탄부터는 노예로 사는 삶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로 했다. 내 생명의 주인은 '나'뿐이고 아무리 권위가 있고 전문성이 있다한들 대체불가하고 매우 개인적인 '생명살림'의 최고 경영자는 바로 나였기에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권리와 자유가 있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것은 나의 존엄성과도 연관이 되었있다. 나는 잃어버린 존엄성을 먼저 되찾아야 했다. 존엄성 없는 경영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


그리하여 나는 무너진 회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경영자의 마음 가짐으로 나의 '생명살림'을 위하여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결단을 내렸다. 나는 폐기능 검사까지 모두 마치고 수술을 며칠 앞두고 있었지만 수술을 취소하였다. 주치의와 진료가 다시 잡혔고 완강한 주치의에게 왜 수술을 거부하는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왜 수술을 취소하셨나요?"

"저는 암의 움직임을 천천히 지켜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려고 그래? 전이되면 어쩌려고?"

"암이라는 게 콩알만큼 자라야 그나마 CT에 찍혀서 나오는 것이고 보이는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그 본질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CT 추적 검사를 통해서 제 암의 특징과 성격을 파악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술을 하면 조직 검사로 암의 이름 정도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또 소중한 제 폐의 일부를 잘라내고 싶지가 않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재생시킬 수 없으니까요."

주치의는 정말 어처구니없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꺾을 생각을 하지 않자 주치의는 다음 추적 검사 때 보자며 진료를 마쳤다.    


나는 암과의 숨바꼭질 2탄부터는 암이 CT상으로 보인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할 것도 아닌 그 무엇으로 정의를 내리며 중도에 서는 연습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자 권위와 전문성 또는 어떤 혹하는 수많은 암과 관련된 고가의 의료기구와 제품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암환자가 되고 보니 암 산업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심신이 취약해진 암환우들에게 각종 의료기구, 식품 등등이 판을 치며 번성하고 있었다.

암환우들은 절망과 통증을 관조하면서 마음과 정신부터 갈고닦아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진부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모든 일이 마음의 힘으로 관장하고 통제하고 조각해 나가는 것이었다.

내 마음의 고삐를 놓치는 순간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져 낙상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고삐를 잡고 자연치유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고삐를 당기고 푸는 법, 말을 대하는 자세 등등의 기술을 연마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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