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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Dec 30. 2023

서른셋, 아이와 암을 잉태한 그녀는 쌍둥이 맘?

조리원에서 응급실에 실려갔던 그날

 어젯밤부터 소리 없이 하얀 눈이 펄펄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세상이 동화처럼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 말괄량이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대설주의보 문자 메시지가 수시로 알람을 울려대도 눈이 내리는 날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우리 아들은 이렇게 추운 겨울, 하얀 눈이 내릴 때 태어났다. 

자신의 엄마가 겨울 왕국을 좋아하는 줄 알고 그 계절에 맞춰서 날 찾아온 것 같았다. 

나는 당시 우리 아들을 조산원에서 자연 출산으로 낳았다. 무통 주사도 맞지 않고 정말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를 재현하여 출산을 해본 것이다. 약 14시간의 출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말이다. 

진통이 오면 열심히 짐볼도 타고 조산원의 방과 거실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나는 3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진통을 달래기 위해 짐볼을 탔다. 짐볼을 타면 감통 효과가 극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걸 몇 시간 동안 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받쳐줘야 했다. 이 정도면 철인 3종 경기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힘이 달리면 파인애플과 초콜릿을 먹으면서 달콤한 출산의 여정을 달려갔다. 

드디어 마지막 출산이 임박했을 무렵에 한 생명체가 그 좁은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힘이 뜨겁게 느껴졌다. "잘한다! 잘한다! 나온다! 마지막! 힘주고!" 조산원 원장님의 응원을 받고 나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아이를 밀어냈다. 그러자 미끄덩하고 태어나 준 우리 아이와 마주한 첫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동그랗고 까만 눈을 번쩍 뜨고 나를 바라보던 우리 아이는 우렁차게 울었다. 


나는 14시간 진통 후 무사히 출산을 잘 마치고 나서는 흐물흐물한 미역이 된 것 같았다. 이래서 한국의 산모들이 출산 후 미역국을 그렇게 먹나 보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한참을 엄마 곁에서 울고 엄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이는 아빠도 보고 아빠의 목소리도 함께 들었다. 나는 한 생명이 탄생되는 극적인 현장에서 감동과 환희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출산을 도와주시던 조산사 이모님께서 내 배를 만지며 굳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어머. 이게 뭐야? 오른쪽 옆구리에 뭐가 만져지는데? 울퉁불퉁한 거 이거 뭐야? 이상한 게 있는데? 태반도 다 빠져나왔는데?" 

나는 나의 오른쪽 옆구리 부위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어서 손안에 가득 만져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뭘까 싶었다. 조산원 원장님께서도 이런 산모는 처음 봤다면서 어리둥절하셨다. 원장님께서는 내게 먼저 미역국에 밥을 먹고 쉬었다가 초음파로 배와 옆구리를 보자고 하셨다. 긴 진통 끝에 출산을 하고 먹는 따뜻한 밥과 미역국은 너무 맛있었다. 나는 아이를 옆에 두고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다 먹었다. 조금 쉬고 나니 몸에 기운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았다. 원장실로 가서 원장님 말씀대로 초음파로 배와 옆구리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내일모레쯤에 산부인과를 가보는 게 좋겠어요. 도대체 저 옆구리에 잡히는 게 뭘까......?"


나는 이틀 뒤에 조산원 근처에 있는 산부인과를 갔다. 산부인과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고 자궁은 깨끗하다는 진료 결과가 나왔다. 원장님께 산부인과에서도 별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고 왔다고 전했다. 그렇게 나는 3박 4일간 조산원에서의 조리를 마치고 아이와 조리원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조리원으로 이동한 날부터 몸이 으슬으슬 춥고 열감기가 있는 게 영 상태가 별로였다. 밤에는 소변이 마려워 2번씩 깨서 화장실을 가느라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증상들은 출산 후 겪는 사소한 증상들이라고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조리원에서 3일째 되는 날에 지인들이 조리원 로비에 찾아왔다. 지인들로부터 우리 아이의 탄생을 축복받고

즐거운 담소로 하하 호호 웃으며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출산 후 나는 그때 가장 처음으로 크게 웃어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웃을 때마다 옆구리에 난생처음 느껴보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근육통과도 비슷한 통증이었다. 나의 웃음을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냉동고 같은 통증이었다. '이게 뭐지?'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몸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지인들께는 몸살 기운이 있어서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고 하고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내 옆구리의 그 울퉁불퉁한 덩어리의 존재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날따라 유난히 더 피곤하였다.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우려고 하는데 그 알 수 없는 묵직한 근육통의 통증이 옆구리에서 또다시 느껴졌다. '몸이 정말 이상한데?'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몸을 다시 일으킬 때에도 통증이 느껴지더니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걸음걸음마다 그 통증이 느껴져서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응급실을 가야 할 것 같다고 호출을 하였다. 남편과 조리원 관리자님의 부축을 받아서 구급차에 탔다. 그렇게 나는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 응급실에 오게 되었다. 이동용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응급실 인턴들의 속사포 같은 질문들이 내 얼굴 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 언제부터 통증이 느껴지셨습니까?" 등등에 대한 질문들을 받기가 무섭게 어떤 순서부터 답을 드려야 할지 나 조차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하고 응급실의 한 침실로 안내받았다. 나는 응급실에서 소변검사와 혈액검사, CT 촬영을 신속하게 받았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한 인턴 선생님이 내게 와서 진료 결과에 대한 대략적인 안내를 해주었다. 그 인턴의 얼굴에는 응급실의 피로와 시름이 뒤엉켜 있었다. "음...... 요로염증이 있어서 항생제랑 진통제 처방이 나갈 것이고요, 항생제 드시는 동안 모유수유는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CT에서는 신장에 혹이 있어서 내일 비뇨기과 외래진료 잡아드렸으니 외래 보시고 자세한 것은 교수님께 여쭤보시면 됩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장에 생겼다는 혹이 그저 어떤 물혹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남편은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나는 새벽에 다시 조리원으로 돌아왔고 항생제와 진통제 덕분인지 그날 밤은 잘 잤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친정 엄마와 함께 대학병원 비뇨기과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갔다. 

나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설마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천진한 눈빛으로 나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경님? 들어오세요." 간호사 언니가 내 이름을 호명하자 엄마와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교수님께서는 내 차트를 열고 시티 찍은 영상을 띄웠다. "하..... 암입니다. 암이에요. 엄청 크네요...... 이렇게 클 때까지 모르셨나요?" 나는 그날 처음으로 피부라는 피복에 감싸 있었던 내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내밀한 나의 속을 속속들이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 앞에 다 드러낸 채로 암을 마주하는 일은 낯설고 묘했다. 우리 아이가 7개월쯤에 내 뱃속에 웅크리고 있던 초음파 사진처럼 커다란 어떤 혹이 우측 신장 쪽에서 장기들을 누르고 잉태되어 있었다. 

나는 눈앞이 흐려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도 내 뒤에서 입을 막고 흐느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 그럼 제가 신장암인 건가요?" 나는 의사 선생님께 내 암의 이름을 여쭤보았다. "정확한 것은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고요, CT 상으로는 일단 다른 곳으로 전이된 흔적은 없어요. 수술 예약이 꽉 차 있는데..... 하......" 비뇨기과 교수님은 나의 커다란 암의 크기에 한번 난감해하시고 꽉 찬 수술일정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몰라서 또 한 번 난감해하셨다. 


교수님의 배려로 나는 가장 빠른 날짜에 수술이 잡혔고 조리원 퇴소 3일을 남겨두고 바로 수술 준비를 위해서 병원으로 입원해야 했다. 당시 나는 아직 출산한 지 2주가 안되었기에 하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아래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끊임없이 내 몸의 어떤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들에 나의 이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수술은 개복 수술로 진행이 될 거예요. 종양이 워낙 커서 명치에서부터 배꼽 아래까지 개복을 하게 될 것이고 흉터가 남을 거예요. 신장이 선천성 기형으로 붙어 있어서 잘라내야 하는 복잡한 수술이에요. 최악의 경우에는 수술을 두 번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요. 또 환자분께서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셔서 장기들이 다 퉁퉁 불어있는 상태입니다. 이 장기들을 눌러놓고 수술을 진행할 거예요." 의사의 건조하고 규칙적인 톤의 수술 안내 설명을 들으며 모두 처음 들어보는 내 몸의 낯선 정보들을 입력하느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렇게 나는 색전술도 하고 예쁘게 양갈래 머리를 따고 수술도 잘 마치고 나왔다. 수술 후 삼일 동안은 그 작은 침대에 꼼짝달싹 못하고 누워서 온전히 겪어내야 했던 그 고통은 산통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하혈 중이라 하얀색 환복바지의 엉덩이 쪽이 수시로 빨갛게 변했다. 밤에는 희한하게 더 아팠다. 무통주사나 진통제로도 한계가 있었다. 배를 살짝만 움직여도 너무나 고통스럽고 아팠는데 그 와중에 생리대도 교체해야 하고 바지를 여러 번 갈아입어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우리 아이를 자연 출산으로 낳은 것은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막달에 혈압이 높게 나온다고 제왕절개를 하자는 의사의 말대로 했더라면 개복수술을 두 번이나 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아이를 낳는 출산의 고통에 이어 암을 낳는 개복의 고통까지 연타로 맞아가며 삶의 큰 파도를 타고 대서양을 헤엄쳐 온 것 같았다. 바닷물을 너무 마신 탓인지 아무리 생수를 들이켜 마셔도 혓바닥에 짠맛이 영 가시지 않는 듯했다. 나는 비로소 쌍둥이 맘의 피로가 얼마나 크고 두 아이를 품어낸 엄마 마음의 크기는 또 얼마나 크고 깊은 마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가 엄마에게 온 것은 아이를 통해서 거울을 보듯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함이라고. 그렇게 나는 아들과 암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면서 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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