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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Jan 06. 2024

미션 임파서블

2024년 1월 5일 미션:아이를 데리고 병원 일정을 소화하시오.

오늘은 새해 첫 진료날이다. 작년 12월 22일에 예정되어 있던 진료가 대학 병원의 사정으로 2주가 넘게 미뤄졌다. 아무튼 오늘 하루는 아이와 함께 해야 하고 병원 일정으로 서울도 다녀와야 하니 빡세게 지나갈 것임은 분명했다. 아이 어린이집의 친한 또래 친구가 아이와 같은 1월생이라 생일 축하 기념으로 오늘 오전에 함께 쿠킹클래스에서 만나 놀기로 했다. 미뤄두었던 은행 업무도 봐야 했기에 나는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오늘 나의 일정은 1부, 2부, 3부로 나뉘어있었다. 1부 일정을 정리해 보면 아이를 데리고 오전 9시 30분에 은행업무를 빠르게 보고 10시 20분까지 운양동으로 가서 키즈베이킹클래스를 듣고 12시에 아이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생일선물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1부가 끝나면 한숨 돌릴 틈 없이 아이를 태우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갔다가 병원에서 남편을 만나서 남편에게 아이를 잠시 맡기고 진료를 후딱 보고 나오는 것이 2부의 일정이었다. 2부가 끝난 뒤에는 3부 육아가 다시 시작되는데 3부에는 아이를 태워서 검단 헬로방방 키즈카페에서 2시간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이는 것으로 오늘 하루의 일정이 끝난다. 


아이와 함께 하는 일정이라 아침부터 숨 가쁘게 흘러갔다. 나는 늦게 일어난 아이에게 아침은 토스트로 대신해 주고 고양이 세수만 시킨 뒤 헐레벌떡 아이와 함께 집을 나왔다. 근처 은행을 갔더니 아침 일찍 달려와서 그런지 다행히 대기가 없었다. 통장을 새로 만드려고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약 30분은 걸린 것 같다. 바쁜 마음에 나는 차에다가 휴대폰을 놓고 오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엄마가 통장을 만드는 30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못 견딘 아이는 언제 끝나냐며 울상을 짓다가 은행 곳곳을 휘저으며 의자를 돌리고 매대에 있는 돋보기안경들을 다 꺼내어보며 떨어트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 얘를 데리고 무슨 은행 업무를 보겠다고 욕심을 부렸을까...... 휴......' 오전부터 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보다 못한 은행 직원이 아이에게 웰치스 젤리를 하나 갖다주었다.

아이는 그 젤리를 먹는 동안은 얌전하게 앉아 있었으나 순식간에 젤리를 다 먹어치워 버리고는 또다시 언제 가냐며 야단이었다. '무슨 통장을 만드는데 무슨 30분씩이나 걸리나...... 하......' 나야말로 아이를 타이르는 일도 지치고 통장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데 지쳐버렸다. "죄송한데요, 조금 빨리 진행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아이가 오전에 베이킹 수업이 있는데 늦으면 안 되거든요......" 나는 울먹이며 신속한 통장 개설을 부탁드렸다. 드디어 통장 개설이 완료되어 따끈한 새 통장과 새 카드를 들고 나와서 아이의 귀때기 한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엄마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지?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면 돼, 안돼? 응?!"


아이는 결국 엉엉 울며 차에 탔다. '늦었다. 늦었어. 이를 어쩌면 좋아.' 예상보다 은행에서 시간이 오래 지체되어 베이킹 수업에 지각할 것 같았다. 나는 안전을 우선하되 최선을 다하여 액셀을 밟았다. 결국 우리는 10분 지각을 하게 되었다. 키즈베이킹 수업은 예약제로 운영되기에 늦으면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했다. 아이 친구 엄마가 같은 우리 아이 생일을 축하한다고 베이킹 수업을 선물로 끊어준 것이었다. 사실 우리 아이는 상남자 기질이 있어서 손으로 오물조물 만지며 만드는 일에 금방 지루해하고 흥미가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도 그 엄마가 함께 케이크 수업을 들어보자고 하여 들어보았지만 우리 아이는 케이크 만드는 일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미끄럼틀에 마음이 가 있었다. 


아이가 흥미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 친구 엄마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7분 지각생으로 아슬아슬하게 베이킹 클래스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벌써 귀여운 모자와 앞치마를 하고 조물조물 공룡 쿠키를 만들고 있었다. "지각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여기 앞에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신호 대기가 길어져서 한참 기다렸어요." 야무지고 섬세한 아이 친구 엄마는 우리 아이가 도착하자마자 발 빠르게 모자를 씌우고 앞치마를 입혀서 쿠킹 교실로 들여보냈다. 뒤늦게 합류하여 아이는 친구 옆에서 공룡 쿠키를 만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며 친구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시름 놓았다. 

우리 아이는 쿠킹클래스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안 돼서 지루해하며 결국 교실 밖으로 나왔다. 

"재미없어! 안 하고 싶어. 놀 거야." 아이가 요리에 흥미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난번 케이크 만들 때에는 그래도 끝까지 만들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쪼물딱 거리더니 교실 밖을 나와버린 것이다. 


나는 아이를 여러 차례 타일러보다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이 자리에 앉아서 아이가 만들다 남은 공룡 얼굴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 보려고 애썼다. 쿠킹 클래스 선생님께서 내게 다가오시더니 "어머니, 아이의 쿠키와 빵은 저희가 만들어 드릴게요. 편하게 나가계셔도 돼요."라며 나를 교실 밖으로 안내해 주었다. 민망함과 미안한 마음이 뒤섞여서 친구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이런 활동을 안 해봐 가지고 잘 못해요. 어쩌면 좋아요. 제가 괜히 미안해지네요." 섬세한 친구 엄마는 오히려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아니에요. 아이들이 다 각자 성향이 다른 거죠. 우리 아이는 아침에 일찍 와서 미끌럼틀 타고 20분 정도 충분히 놀다가 쿠킹 교실에 들어갔어요. 오자마자 놀고 싶었을 거예요." 


결국 우리 아이는 베이킹 클래스에 가서 베이킹은 선생님에게 맡겨두고 1시간 30분 동안 미끄럼틀을 신나게 타며 이곳저곳을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며 놀았다. 베이킹이 끝나고 나온 친구 아이는 우리 아이와 합류하여 신나게 뛰어놀았다. 정신없이 쿠킹 클래스에 와서 아이와 함께 있다 보니 벌써 정오 12시가 되었다. 

12시에는 다음 친구들의 쿠킹 클래스가 예약되어 있어서 나가야 했다. 우리는 서둘러 쿠킹 클래스를 나왔다. 친구 엄마가 근처에 자주 가는 돈가스 집이 있다고 거기에 가서 점심을 먹이자고 했다. 차를 타고 나와서 돈가스가 있는 상가 건물로 갔다. 지하에 주차를 하고 올라가 보니 돈가스 가게가 오늘은 운영을 안 하는지 문이 닫혀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돈가스 대신에 그 상가 건물에 있는 생선구이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 점심으로 고등어구이를 먹이기로 했다. 생선구이집은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뛰어놀아서 배가 고팠는지 배고프다고 야단이었다. 고등어를 주문하려는데 친구 엄마가 크고 동그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어머! 핸드폰을 놓고 왔네!"

친구 엄마는 쿠킹클래스에서 핸드폰을 충전해 두고 깜박하고 그냥 온 것이었다. 그 순간 나도 양손을 주머니에 넣어서 핸드폰을 찾아보았다. "어머! 저도 핸드폰을 두고 왔네요? 웬일이야. 제가 얼른 갔다 올게요."

아이를 볼 때에는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는 친구 엄마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얼른 쿠킹 클래스로 가서 친구 엄마 것과 나의 휴대폰을 가지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먹음직스러운 고등어가 지글지글 석쇠에 구워져 나와있었다.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하얀 밥에 고등어 살을 올려주었더니 순식간에 한 그릇을 쓱싹 비웠다.

나와 친구 엄마는 아이들에게 밥을 다 먹인 뒤에야 밥 한 공기를 추가 주문해서 주린 배를 채웠다.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식당 바깥으로 나왔는데 그제야 나와 친구 엄마는 주차등록을 깜박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식당으로 아이들과 우당탕탕 들어와서 주차등록을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나와 아이 친구 엄마는 같은 1월생 아들을 둔 엄마라는 점과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을 키운다는 점도 서로 여러모로 닮았지만 무엇보다 덜렁거리고 길을 잘 잃어버리는 면도 많이 닮아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와 친구 엄마는 암묵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와 함께 오늘의 1부 일정이 이렇게 끝났다. 


나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2부 본편을 위해서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까지 1시간은 걸릴 터였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 몇 구간 빼고는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아이는 한참을 뒷좌석에서 징징거리더니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다. 

"휴..... 잠들었다....." 아이가 잠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에는 평화와 여유가 샘솟았다. 

아이가 깨어있다면 달려가는 1시간 동안 또 언제 도착하느냐며 보채고 징징대는 아이를 타이르고 아이의 모든 질문에 대꾸를 해줘야 했다. 나는 운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그 와중에 아이까지 살펴야 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아이는 병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는데도 여전히 잠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료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하여 남편이 올 때까지 나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바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단잠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자동차 운전석 문을 여는 소리에 깨서 보니 남편이었다. 나는 순간 단잠에 빠져 진료 시간이 늦은 건 아닌지 심장이 덜컹하여 옷소매를 밀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진료 시간이 되기 15분 전이었다. 남편에게 아이가 잠들었으니 깨우지 말고 그냥 차에서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했다.


나는 늘 그렇듯이 익숙한 걸음으로 암병동 3층 진료실로 가서 키오스크에 도착 확인을 했다. 키오스크에 진료번호를 찍고 몸무게를 측정하였다. 평소보다 3킬로가 더 나와서 롱패딩을 벗고 다시 몸무게를 재보았더니 3킬로가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혈압까지 다 재고 대기 의자에 앉아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의 풍경은 늘 그렇듯이 재미있거나 생기 넘치는 풍경은 아니었다. 환자들의 얼굴과 표정도 기운이 없었고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적인 풍경도 그랬다. 나는 대기실에서 웃고 있거나 미소를 짓고 있는 환자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 옆에 앉아있던 어떤 중년의 환우가 잔뜩 화가 나서 간호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2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도대체 내 이름은 언제 뜨는 거요?" 그 환우는 2시간 전부터 와서 목 빠지게 진료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예약제라 그렇게 미리 와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간호사 언니가 차분한 어조로 불만에 가득 찬 그 환우에게 병원의 예약제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환자분, 저희는 예약제 진료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예약 시간에 맞춰서 대기해 주시면 되시고요, 환자분은 3시에 진료가 예약되어 있으신데요, 현재 진료가 지체되어 10분 정도 늦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호명하면 들어와 주세요." 


잠시 후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이에요." 교수님께 인사를 드렸다.

주치의 교수님께서 2주간 병가를 내셨다고 들었기에 지금은 괜찮으신 건지 어디가 아프셨는지 궁금했지만 그 엄숙하고 차가운 침묵 속에서 마우스 커서 돌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드디어 교수님께서 먼저 입을 열고 말씀하셨다. "괜찮네요. 폐도 깨끗하고요, 덩어리 크기도 줄어들었고요, 피검사도 모두 정상입니다. 이대로 지켜보도록 합시다. 3개월 뒤에 뵐게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진료는 늘 이렇게 간결하게 끝나곤 했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띠며 그 엄숙하고 무거운 대기실을 뚫고 나왔다. 그 사이에 아이는 잠에서 깨서 남편과 함께 암병동 1층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진료 소식을 전했다. "축하해.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남편은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남편은 다시 부랴부랴 회사로 복귀하고 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 엄마를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을 아이에게 뽀로로 주스를 하나 사주었다. 이제 2부가 끝났으니 3부는 헬로방방에서 신나게 놀자고 검단으로 넘어갔다. 아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키즈카페를 휘저으며 신나게 놀았다. 헬로방방에서 나는 아이와 미끄럼틀을 타고 타잔이 되어 밧줄 타기를 하였다. 화려한 조명 아래 트램펄린에서 흥이 넘쳐 퐁퐁퐁 뛰며 데구루루 구르는 아이를 응원하기 위해서 "멋지다! 잘한다! 신난다!"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다 보니 허기가 느껴졌다.  다시 순식간에 2시간이 흘러갔다. 캄캄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저녁 7시 20분이었다. 

나도 아이도 모두 녹초가 되어버렸다. 배가 너무 고픈데 그냥 누워서 이대로 자고 싶었다. 


잠시 후 남편이 퇴근하여 집에 들어왔다. 아이가 배도 고프고 열이 나는 것 같다며 징징댔다. 체온을 재보니 정상 체온이었지만 오늘 힘든 일정을 소화하느라 아이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현미밥에 김가루를 뿌려서 참깨 소금, 들기름을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남편과 아이에게 "오늘 저녁은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하자."라고 선포했다. 

나는 주먹밥 몇 개를 집어먹고서는 소파에 철퍼덕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설거지통에 잔뜩 쌓인 설거지는 남편에게 넘겼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글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려고 했지만 아이와 나는 그대로 누워서 잠이 들어버렸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스펙터클 하고 다이내믹한 미션 임파서블이다. 육아와 치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님에 틀림없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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