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는 비록 실패작이지만 비주얼로 사진은 살렸다.
오늘은 우리 아들이 5살이 되는 생일날이다. 나는 밀가루에 설탕이 듬뿍 들어간 시판 케이크를 사고 싶지 않았다. 아침부터 비건 당근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흙당근을 꺼내어 씻었다. 케이크 재료로 캐슈너트가 필요했는데 집에 캐슈너트가 없었다. 남편에게 오늘 아이 생일 케이크를 직접 만들 거라며 이마트에 가서 캐슈너트과 두유를 사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남편은 알겠다고 하고 마트로 갔다. 나는 남편이 장 보러 간 사이에 푸드프로세서에 당근을 적당히 갈고 대추야자와 시나몬, 호두, 아몬드를 넣고 크러스트를 만들었다.
간 당근과 크러스트를 섞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찾았어? 샀어?" 나는 받자마자 남편에게 부탁한 재료들을 잘 샀는지부터 물어보았다. 남편은 내게 두유는 샀는데 캐슈너트가 없어서 자신이 고른 게 맞는지 카톡으로 확인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카톡을 보니 남편이 견과류가 이것저것 섞여있는 하루견과 한 박스를 찍어서 보낸 것이었다. "아니, 그거 말고 캐슈너트 사 오라고 했잖아. 캐슈너트만 들어있는 거 사 오라고. 없어? 없을 리가 없는데? 내가 매번 이마트 갈 때마다 봤는데 그게 왜 없어? 모르겠으면 점원한테 물어봐. 아휴....." 견과류 코너에 조금만 잘 찾아봐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걸 또 못 찾고 하루 견과를 집어서 카톡으로 보낸 것이다.
남편은 늘 매우 간단한 심부름 부탁을 어렵게 처리하는 특징이 있었다. 주문한 물건을 잘못 사온 적도 많고 이상한 실수를 한 적이 많아서 웬만해서는 내가 다녀오는 편이 속 시원했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는 시기 지난 육아 용품들을 나눔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에게 나눔 받을 육아 용품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남편은 한참 헤매다가 그 집 문 앞에 있는 웨건을 끌고 온 적도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걸 도대체 왜 가져온 거냐고 물으면 집 앞에 이거밖에 없어서 긴가민가하다가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모차 안에 두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다시 얼른 갖다 놓으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남편은 동호수를 잘못 찾아갔던 것이었다.
또 한 번 나는 남편에게 나눔 받을 육아용품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이웃집 앞에 내놓은 분리수거 쓰레기를 가져온 적도 있었다. 한, 두 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매우 간단한 심부름조차도 빙글빙글 돌고 돌아서 해결해 오는 느낌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남편은 한참을 찾아 헤매다가 캐슈너트를 찾았는지 또다시 휴대폰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카톡 확인해 봐요. 이것밖에 없는데 이게 맞는지." 카톡에 남편이 보낸 사진을 확인해 보니 '로스티드 캐슈너트'이라고 쓰여있었다. "맞아. 이거야. 고생했어요. 끊어." 이마트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 또 빙글빙글 돌고 돌아서 오는 건지 고작 2개 사가지고 오는데 1시간 남짓 걸렸다. 바로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는데 흐름이 끊겼다. 그때 삐삐삐삐삐삐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남편 왔다.' 나는 지저분해진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편은 1시간 만에 내가 주문한 미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쩐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소리가 불길하여 나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잘 사 왔네? 고생했어."
그런데 남편이 내 앞으로 오더니 자크가 고장 났다며 고장 난 자크를 어떻게 좀 빼보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미끼에 낚인 메기처럼 목부위에 자크가 걸려있었다. "나 참......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진짜 신기한 사람이다." 자크가 목 부위까지 거의 올라간 상태에서 걸려버렸는데 남편의 목이 꽉 껴 있어서 옷을 위로 벗을 수도 없었다. 자크는 위로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았다. 나는 한참을 하다가 안 되겠다며 이 상태로 세탁소에 갔다 오라고 했다."세탁소에 가서 빼달라고 해. 나는 더 이상 못하겠어. 어떻게 늘 이렇게 힘든 일을 덤으로 만들어서 오는지......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
남편은 얼굴이 오만상이 되어 왜 아들 생일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알 수 없다며 울상이었다. 나는 다시 남편의 목젖 부근에 있는 자크를 있는 힘껏 위로도 당겨보고 아래로도 당겨보았다. 그러다 낚시꾼에게 목덜미가 잡힌 메기 같은 남편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진짜 웃기다. 당신은 진짜 희한한 방법으로 내게 웃음을 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웃겨서 못하겠어." 나는 한참을 웃다가 다시 있는 힘껏 자크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때 퍽! 소리와 함께 자크가 풀렸다.
남편의 점퍼 지퍼의 한쪽 이가 나가버렸지만 말이다. 내게는 곰 같은 남편이 있어서 항상 곁에 묵직한 존재감이 있었지만 곰의 둔하고 무거운 행동에 따르는 피로감도 컸다. 남편의 점퍼는 지퍼를 수선하는 비용이나 새로 장만하는 비용이나 도찐 개찐일 것 같았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남편을 위한 점퍼를 새로 장만해 주기로 하고 마저 만들던 케이크를 완성했다.
나는 완성한 케이크를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오후 12시 5분이었다. 오전 시간을 케이크 만드는데 다 사용해 버린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뒷정리를 하고 외투를 입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
밤새 눈이 내려서 도로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패딩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나오자마자 친정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아이 데리고 출발한다. 40분 안에 도착해."
케이크를 얼리려면 3시간은 필요했는데 어제 친정집에 갔던 아이가 생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아빠랑 엄마가 일찍 아이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산책도 반쪽밖에 못했다. 나는 동네 빵집에 들러서 고깔모자와 케이크에 꽂을 초를 샀다. 집에 왔더니 엄마랑 아빠, 남편, 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케이크 더 얼려야 하는데......" 결국 나는 덜 얼려진 상태에서 케이크를 조심조심 꺼내어 빨간 딸기와 바나나로 토핑을 올렸다. 딸기와 바나나를 올리자 정말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아이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초를 꽂아서 불을 켰다. 아직 환한 대낮이라서 촛불이 예쁘게 빛나지는 않았어도 그저 케이크에 꽂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 아이는 너무 기뻐했다.
'벌써 우리 아이가 5살이라니.....'
나는 지난 5년이 5분도 안 돼서 지나가 버린 시간처럼 너무 짧고 아쉽게만 느껴졌다. 지난 5년은 정말 전쟁터의 전사처럼 필사적으로 살아온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전투적으로 살아왔던 것인지 앞으로는 힘을 좀 빼며 취권 하듯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생아 시절의 꼬물꼬물 한 우리 아이 사진을 보니 암선고 이후 치병을 하느라 아이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시간들만 떠올랐다.
내가 만든 비건 당근 케이크의 비주얼은 아주 좋았다. 사진은 예쁘게 건졌지만 맛은 영 별로였다. 아이는 한입 먹더니 맛없다고 입도 대지 않았고 엄마랑 아빠도 간신히 반조각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먹었다. 나랑 남편은 그래도 아이 생일이니 한 조각씩은 먹자고 먹긴 먹었는데 딸기 없이 먹기에는 너무 느끼했다.
"앞으로는 케이크는 그냥 사서 하자."
나는 엄마의 마음보다 달콤한 생크림의 맛을 선호하는 아이의 취향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이가 영 상태가 안 좋았다. 지난 금요일, 엄마를 따라서 서울로 진료를 다녀오면서부터 미열이 있는 듯싶더니 토요일에 할머니네 가겠다고 떼를 써서 친정집으로 보냈던 참이었다. 결국 오늘 아침부터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아이는 세 번이나 초를 켜고 불어댔다. 그렇게 우리 아이의 5번째 생일을 축복하고 나는 오랜만에 엄마 아빠와 둘러앉아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실패작 케이크를 애써 먹고 있었다. 엄마도 나와의 심리적 거리가 매우 멀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오늘따라 엄마의 2번 재수술한 쌍꺼풀이 더 진하게 보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 딸, 애썼다." 나의 부모님은 1년이 지난 후에야 나를 토닥일 수 있었다. "큰 이모부가 대장암 수술 하고 항암도 했는데 간으로 전이가 되고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 봐. 큰 이모가 이모부한테 기운을 내서 자연 치유를 권해도 영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아무 말 없이 실패작 케이크에 딸기를 올려서 한입 떠먹었다. "큰 이모가 고생이 많네. 그런데 환자의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존중해 주고 응원과 격려를 해주는 것 외에는 보호자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엄마랑 아빠도 내가 이 길을 선택했을 때 찬성할 수 없었잖아." 부모님은 나의 냉담한 반응에 씁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큰 이모부의 상황이 결코 낯설거나 생소하지 않았다. 대학병원의 표준 치료에 자신의 생명을 몽땅 내맡기고 결국 그렇게 진행되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른 환우들과 세상을 떠난 환우들의 소식들을 종종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암선고를 받고 겁에 질린 환우들에게 표준 치료를 겁박에 가깝게 밀어붙이고 수많은 환우들이 '대학병원 전문의'라는 권위에 짓눌려 의사들의 의견대로 진행하는 모습을 익히 곁에서 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암이 더 고약해져서 전이와 재발로 손쓸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상황에 처한 환우들도 보게 되었다. 그때 절박한 환자에게 내뱉는 의사의 그 한 마디가 대학병원의 표준 치료가 갖고 있는 한계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였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마더 퍼커 쉣! 이게 무슨 막걸리같은 소리인가?하......'
당시에 남편의 직장 동료의 지인도 내가 다니던 대학병원에서 유방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진료일이 겹치는 날에는 암병원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3살 적은 나이의 유방암 환우였다. 그녀는 유방암이 후두암으로 번진 상태에서 항암 치료를 권고받고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마지막 의사의 한마디는 냉담했고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남편으로부터 그녀가 끝내 별이 되었고 가족들끼리 조용하게 장례를 치르고 49제가 끝난 뒤에서야 자신도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 병원은 세련된 호랑이 동굴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다시는 그 동굴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응시하면 상대를 감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자연치유의 길을 결심하고 가장 큰 산은 부모님이었다. 우리 부모님 또한 자연치유의 길을 가는 나를 보며 그 누구보다 힘들어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암환우의 보호자는 아무리 가까운 부모나 남편, 형제, 자녀 관계에 있더라도 암환우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기다리며 그 선택을 존중해 주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애가 타고 가슴이 미어지더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곁을 지켜주는 것이 보호자로서 가장 최선의 사랑이다. 암환우에게 가장 훌륭한 보호자는 수승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어떤 큰 위기를 겪어보고 극복해 본 경험이 없다면 그런 정신력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고차원의 정신력을 가진 보호자를 아직 본 적이 없다.
우리 부모님도 딸의 암선고가 첫 경험이었고 그걸 지켜보며 수없이 무너졌다. 부모님의 심정은 나도 알겠지만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가는 내게 그런 마음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의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야 했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울부짖음과 그 걱정스러운 마음이 전해져 계속 뒤돌아보게 되고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다. 이러다간 밥도 죽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내가 정기검진을 다녀온 날에는 "너 인마, 수술해야 해! 인마! 너 수술 안 하면 죽어! 인마."
정작 당사자인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수술을 해야 한다며 우리 집 비밀 번호를 누르고 집에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날 나는 엉엉 울며 아빠와 대판 싸웠다. 나는 결국 부모님의 쓰러진 감정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곤 했다. 정말 가슴 아프지만 나는 부모님을 끊어내야 나의 길을 갈 수 있음을 그때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치병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부모님을 멀리했다. 부모님과 연락도 하지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다.
가족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부모님은 늘 약자의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것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문의의 말대로 따르는 게 정녕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었다. 나는 처절하게 혼자서 매일 산으로 향했고 그 발걸음은 끊임없이 내 심장을 향해서 '그냥 너의 길을 걸어가면 돼.'라고 펌프질 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안전지대는 나의 '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수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나의 심장부로 원초적인 산의 힘과 실행력을 실어 보냈다. 두근두근두근. 나는 그동안 1분 1초도 쉬지 않고 뛰고 있는 나의 심장 소리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알았다. 규칙박으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몸을 들썩이게 하는 힙합 비트처럼 완전히 새롭게 들렸다. 순간 나는 음악적인 삶과는 무관한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랩을 만들어서 불러보고 싶다는 창작의 욕구가 샘솟았다.
하루하루가 두근두근거리는 비트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액션 영화의 여전사처럼 전투적으로 살았다면 나는 이제 온몸에 힘을 빼고 흥을 느끼며 건들거리기도 하고 엉덩이를 실룩샐룩 흔들면서 즐겨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이가 밤새 열이 나서 신음하고 뒤척이느라 나도 함께 잠을 설쳤는데 다행히 지금은 열이 떨어졌다.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꼭 나도 목이 칼칼하고 몸살감기에 걸리곤 한다. 목 뒤에 파스 하나 붙이고 오늘은 가정보육을 하게 될 것 같다. 아이의 두근거리는 작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해야겠다.
아이 덕분에 밤잠을 설쳤지만 고요한 새벽은 글쓰기에 좋은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두근두근. 고요한 새벽에 1분 1초도 쉬지 않고 가슴팍에서 울려오는 그 비트 소리를 들어보라.
세상의 비밀이 그 소리에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