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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Jan 09. 2024

레몬꽃과의 행복했던 시간들

나는 아픈만큼 상큼해졌다.

오늘 나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나는 밤새 오르락내리락하는 열로 신음했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듯한 근육통과 인후통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레몬차를 마셔야겠다.' 새벽 4시쯤 나는 레몬차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주방으로 나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서 레몬 하나를 꺼냈다.냄비에 물을 올리고 물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에 레몬을 스퀴즈 해서 레몬즙을 짰다. 머그잔에 레몬즙과 밤꿀을 가득 짜서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잘 섞어주었다. 따끈하고 상큼 달콤한 레몬즙을 마시니 따끔거리는 목 통증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레몬차는 이렇게 목이 아플 때 마시면 그 깊은 레몬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새벽에 짜낸 이 레몬즙은 정말 귀한 레몬이다. 문수산 아래 시골집을 얻어서 들어오면서 작년 봄, 나는 레몬나무 한 그루를 입주시켰다. 레몬 나무는 할머니네 마당에서 햇빛과 바람, 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지난봄부터 피어난 레몬꽃은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행복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다. 상큼하고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레몬꽃에 코를 대고 있으면 나는 마치 레몬 나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레몬꽃이 한 떨기 두 떨기 피어날 때마다 꽃으로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왔다. 그러더니 꽃이 떨어지며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초록빛 레몬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 레몬이다! 할머니! 레몬이 나왔어요!" 

나는 다 자란 레몬을 마트에서 보기만 했지 이렇게 작은 아기 레몬은 처음이라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춤에 뒷짐을 지고 자라난 아기 레몬을 바라보며 개수를 세었다."아이고 예뻐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나 열렸네!" 할머니와 나는 활짝 웃으며 아기 레몬들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께서는 매일 정성껏 레몬 나무에 물을 주고 가꿔주었다. 5개 중에 2개는 중도에 떨어져 버렸다. 남은 3개의 열매들은 봄, 여름, 가을을 보내며 무럭무럭 커갔다. 


레몬 나무는 겨울에는 추워서 실내로 들여보내줘야 했다. 마당에 있던 레몬 나무를 할머니와 함께 빙글빙글 굴려가며 실내의 창고 공간의 한쪽에 두었다. 초록빛 레몬 3형제는 창고에서 겨울을 보내며 노랗게 익어갔다. 나는 어제 시골집에 가서 그중에 하나를 따서 집에 가져왔다. 할머니와 함께 정성껏 한 해를 함께 보내며 키워낸 소중한 유기농 레몬이었다. 1년에 겨우 3개의 열매가 달리는 것으로 보아 생산성은 지극히 떨어지지만 레몬꽃을 보며 느끼는 사랑과 행복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나는 따끈한 레몬차를 한 잔 다 마시고 된장국을 끓였다. 고등어 한 손을 에어프라이어 넣고 구웠다. 

'잠도 못 자겠는데 남편 아침밥이나 해주자.' 어제부터 아파서 앓느라 저녁도 꼬마김밥으로 때우고 냉장고에는 김치밖에 없었다. 남편 아침으로 고등어구이와 된장국을 끓여놓고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목이 다시 따끔거리고 기침이 나왔다. 어제 약국에서 약이 나오길 기다리는 도중에 매대에 전시된 레몬사탕이 눈에 띄어 사가지고 왔다. 그걸 하나씩 까서 녹여먹으면 칼칼하고 따끔거리는 목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레몬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입안에서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을 청해보았다. 땀이 뻘뻘 나고 온몸이 욱신거려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어나 있거나 눈을 뜨고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목이 타서 찬물을 마시고 싶었다. 


작년에도 나는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한 해를 잘 보냈다. 하지만 작년 겨울에는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체적 아픔이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몸살 정도 가지고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내가 걱정된다며 자신이 회사에 이야기하고 일찍 오던지 하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으니 회사 일에 지장 주지 말고 일 잘 보고 들어오라고 말하며 남편을 편안히 출근시켰다. 그나저나 아이가 문제였다. 대설주의보로 눈도 가득 내려서 도로도 미끄러울 테고 어린이집까지 차로 30분을 달려가야 했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가정보육을 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 밥도 먹여야 하고 에너지 넘치는 아들과 놀아줘야 할 텐데 이미 내 몸은 내게 브레이크를 잔뜩 걸어두어 버린 것이었다. 


결국 나의 비상 호출로 인천에 사는 친정 엄마가 눈길을 뚫고 달려왔다. 오전 10시가 넘도록 아이는 쿨쿨 자느라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난해 치병을 하며 부모님과 연락을 끊고 혼자 고군분투하며 보내는 동안 엄마와 나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엄마는 일 년 만에 딸 집에 와서 주방에 있는 살림들을 만졌다. 설거지 통에는 설거지가 쌓여있었고 거실 바닥에는 빨래가 산더미로 쌓여있었다. 엄마는 그것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나갔다.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의 몸짓과 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왔다. "툭 툭 툭 탁탁탁 드르륵 득득 타 다다다 다닥"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하고 편안한 소리였다. 엄마가 열정적으로 부엌일을 하느라 요란한 소리가 집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데도 우리 아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우리 아이는 이럴 때 보면 정말 타고난 효자였다. 그냥 내버려 두면 11시까지는 거뜬히 잘 것 같았다. 엄마는 그 사이에 배, 대추, 생강을 넣고 생강차를 끓여서 꿀을 넣어 한 잔 갖다주었다. "뜨끈할 때 한 잔 마셔. 이거 마시고 밥 좀 먹어야지. 밥을 먹어야 약을 먹지. 엄마가 무나물에 감자볶음이랑 했어. 김이랑 밥이랑 같이 조금 먹어봐." 엄마가 해준 밥을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건지 엄마의 밥상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영 밥맛이 없었다."아침에 누룽지 끓여서 먹었어. 약도 먹었고. 밥 맛이 없어. 그냥 좀 누워있는 게 낫겠어." 나는 생강차 한잔을 뜨끈하게 마시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엄마는 아이 방으로 가서 자는 아이 엉덩이를 때리며 아이를 깨웠다. 아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할머니의 방문에 놀란듯했다.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반가운 할머니와 화장실로 가서 오줌을 누고 침실에 누워있는 내 곁으로는 올 생각도 없어 보였다.

'너무하는군. 타고난 효자라고 생각했던 건 다 착각이었네.' 

나는 누워서 거실에서 아이와 친정 엄마가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엄마가 거실에 쌓인 빨래를 접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어제 아빠가 사 온 프링글스 과자를 먹겠다고 졸라댔다. '왜 우리 남편은 저런 과자를 4살 아이에게 사다 주는 걸까.' 반복되는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은 그냥 아이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친정 엄마는 아이에게 이건 어른들이 먹는 과자라고 이런 과자는 아이들이 먹기에는 너무 짜고 좋지 않다고 잘 타일러 가르쳤다. 

"밥 먹어야 하니까 아주 조금만 줄 거야. 할머니 먹을 것도 남겨두고." 

친정 엄마가 빨래를 다 개키고 침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 병원 가서 수액이라 타미플루 맞고 오면 덜 고생해. 얼른 엄마랑 같이 가서 맞고 오자." 

나는 도저히 몸을 일으켜서 나가기가 힘들 것만 같았다. 엄마랑 아이랑 같이 병원에 가는 일은 더 번거롭고 번잡스러울 것 같았다.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 

"혼자 갔다 올 수 있겠어? 그럼 조심해서 잘 다녀와. 엄마가 아이 밥 먹여서 인천에 데리고 갈게."

"응. 고마워. 갔다 올게." 나는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나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얀 함박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너무 예쁘다." 나는 그 와중에도 함박눈이 너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 스키장으로 달려가서 스키를 신나게 타고 와야 하는데......"신나게 스키를 타고 먹는 라면과 핫초코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함박눈을 보며 스키장을 가야 하는 날씨라고 생각하는 나도 정말 못 말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고 한적했다. 나는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증상을 이야기하고 어제 소아과에서 독감검사 없이 독감증상 같다는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서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병원에서는 독감 검사를 하셔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독감 검사 진행 후에 수액주사를 맞기로 했다.

독감 검사 결과 인플루엔자 A 독감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약물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과 독감치료의 안내와 설명을 듣고 수액치료실로 갔다. 약 45분가량 수액치료를 받고 나왔다. 수액치료를 받고 났더니 근육통은 즉각 많이 개선된 것 같았다. 상가 건물에 있는 죽집에 가서 낙지김치죽을 시켰다. 낙지김치죽이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쓴 맛이 느껴졌다.'내 입맛이 쓴 건가? 왜 이렇게 쓴 맛이 나지.' 나는 작은 그릇에 국자로 두 번 덜어서 먹다가 결국 다 못 먹고 용기에 포장을 부탁하여 남은 죽을 집으로 가져왔다. 약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혼자 대낮에 침대에 누워서 쉬어본 일이 얼마만인지 지난 1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늘 산에는 못 가겠네. 아무리 아파도 가려고 했는데......' 나는 스르르륵 잠이 들었다. 약 2시간을 땀을 흘리며 잤다. 이틀간 오한과 근육통으로 잠을 못 자고 괴로운 밤을 보냈는데 수액치료를 받은 탓인지 근육통이 개선되어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귀가하였다. 엄마가 해놓고 간 감자볶음, 무나물, 멸치볶음 밑반찬들을 꺼내어 저녁을 차려주었다. 국은 새벽에 끓여놓은 된장국을 끓여서 스스로 퍼서 차려먹으라고 하고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레몬캔디를 하나 까서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녹여먹었다. 레몬캔디는 내가 아픈 만큼 나를 상큼하게 만들었다. 시골집에서 내게 사랑을 전해주었던 그 향기로운 레몬꽃과의 추억이 미각에서 시각, 촉각, 후각, 청각으로 연결되어 내 몸과 마음에 상큼한 노란 레몬의 사랑이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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