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겡끼 데스까?
입춘이 지나기 무섭게 문수산에 하얀 눈이 내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춘을 맞이하면서도 하얀 겨울을 한번 더 보지 못하고 이대로 겨울을 보내는가 싶어서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가 보다.
하얀 눈을 맞으며 산을 올랐다. 산은 봄에는 꽃이 피어나 향긋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푸르러 싱그럽다.
가을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아련해지고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마다 눈이 소복이 내려 신비로운 겨울왕국이 된다.
겨울은 춥고 혹독한 계절 같지만 하얀 눈이 내려서 더 없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눈 내리는 날에는 산에 등산객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늘 걸어가는 통제구역 성곽길로 갔다. 끝없이 아득해 보이는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은 하늘에서 눈까지 내리니 그 길을 걸어가는 나를 함박눈이 축복해 준다.
나는 오늘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이 되기로 했다.
신발을 벗고 통제구역 성곽길을 다다다다다 달려갔다. 그리운 마음을 부둥켜안고 탁 트인 곳에 멈춰 섰다.
하얀 눈처럼 소복이 쌓인 그리운 마음으로 이별해야만 했던 그를 향해 외쳤다.
"오겡끼 데스까?" 돌아오는 것이라곤 메아리뿐이지만 그에게 나의 안부도 전한다.
"와따시와 겡끼데스!" 아무도 없는 산에 하얀 눈이 내리니 홀로 이별해야 했던 첫사랑을 떠올리며 이렇게
아련해질 수가 없다. 나는 나의 상황에 맞게 그리운 연인 대신에 암선고로 갑작스럽게 이별해야 했던 나의 행복했던 시간들에게 다시 안부를 물었다.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나는 한껏 감정을 끌어올려 잃어버렸던 행복하고 찬란했던 그 시간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펴고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다시 흙 묻은 발을 닦아내고 양말과 신발을 신고 성곽길을 걸어가 본다. 날마다 올라오는 문수산이지만 하얀 눈이 오니 전혀 다른 산에 온 것만 같다.
하얗게 눈으로 쌓인 데크에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세상 폭신하고 시원한 천연 눈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하늘을 이불 삼아 덮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오더니 내 주변을 맴돌았다.
하얀 눈을 뭉치고 굴려서 작고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었다. 내가 만든 울퉁불퉁한 눈사람을 보며 한참을 배꼽 빠져라 웃어댔다. 눈사람 친구와 함께 성곽에 앉아서 설경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또 깔깔깔 웃었다.
중봉쉼터에서 썰매를 타려고 배낭에 챙겨 온 뽁뽁이를 꺼냈다.
"오겡끼 데스까?" 그리움을 가득 담아 암선고 후 갑작스럽게 이별해야만 했던 나의 행복들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불러보고 뽁뽁이를 타고 슬로프를 쌩~! 하고 내려왔다.
"으하하하하하하"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썰매를 타며 하얀 눈에 그대로 드러누워 마구 웃어댔다. 앉아서도 타고 엎드려서도 탔다. 아이와 함께 할 때는 엄마로서 아이의 썰매를 끌어주는데 집중했기에 이렇게 내가 동심으로 돌아가 눈 그 자체를 즐기며 썰매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등등의 누구의 세계에서 나와서 그저 뽁뽁이 한 장에 몸을 싣고 동심으로 돌아가는 순수의 세계로 순간 이동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눈 내린 겨울 산을 즐기는 방법이다. 얼마나 상쾌하고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인생이 곧바로 싱싱해지고 신선해진다.
산에서 신나게 놀고 내려오는 길에 잠시 멈춰서 끝없이 아득하게만 보이는 긴 성곽길을 내려다보았다.
이 산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나는 이 산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마음에 산을 품게 되었다. 내 마음에는 고라니 3500세대가 살고 있고 다양한 종류의 새들도 7500세대나 살고 있었다. 생태 환경이 좋아서 뱀들도 많이 살고 있다.
마음에 산을 품고 산다는 것은 자연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다.
겨울이 되면 산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 더욱 아련해진다.
눈이 내리면 산에 올라 외쳐본다.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