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며 소파며 다 정리를 했는데......
그동안 내 삶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 5년간 치병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인생의 힘든 고비를 지나왔던 김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양시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묵히고 쌓였던 살림살이들도 많이 정리가 되었다.
큰 공간을 차지하는 침대, 소파, TV, 러닝머신과 같은 가구들은 이사오기 전에 모두 처분하고 비워냈다.
옷 짐도 많지는 않은 편인데 그중에서도 입지 않는 옷들은 모두 정리해 버렸다.
남편 옷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정장, 등산복 등등은 모조리 정리해 버렸다.
아이의 철 지난 옷, 작아진 옷들도 모두 나눔을 해버렸다.
책들도 싹 정리했다.
손님용 접시라며 5년간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부엌 상부장 꼭대기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그릇들도 모두 정리했다.
우리 3인 가족에게 가장 필요하고 쓰임새 있는 최소한의 물건들만 남기고 대대적인 정리가 되었다.
포장이사업체들이 마구잡이로 정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사업체에 4일 전에 박스와 바구니를 좀 갖다 놔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사하기 4일 전부터 조금씩 정리된 물건들을 분류해서 쌌다.
이사할 집이 공실이라서 미리 작은 방 하나를 드레스룸으로 정하고 시스템장을 설치해 두었다.
시스템장을 중고로 사서 아빠랑 같이 진땀 빼며 설치했는데 다음부터는 다시는 이런 삽질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힘들게 설치한 시스템장에 옷은 미리 이사박스에 담아서 이사하기 이틀 전에 용달을 따로 불렀다. 옷짐들을 그대로 옮겨서 시스템 헹거에 미리 걸어두었더니 이사에 대한 부담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물건들마다 마구 섞이지 않도록 박스별로 어떤 살림살이들이 들어있는지 체크해 두었다.
이번 이사가 결혼한 후 두 번째 이사인데 이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남편은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편은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정말 도움이 안 되었다. 남편이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면 결국 다시 나의 손길이 가야만 했고 한 번에 끝날 일이 두 번 또는 세 번을 하게 되어 그만큼 시간과 노동이 더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사를 가는 날도 남편은 갑자기 회사의 중요한 미팅이 생겼다며 저녁 늦게 들어왔다.
남편은 이사를 하면서 어쩐지 나와 갈등이 생길 것을 미리 피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그 모든 살림살이들을 혼자서 이틀에 나눠서 각각 들어갈 곳에 정리를 했다.
'무슨 일이든 와이프가 억척스럽게 씩씩하게 해내니 당연한 줄 아는구나. 하......"
나는 남편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이삿짐센터 팀장님께서는 공구도 잘 다뤄서 헹거의 옷봉도 척척 달아주셨다.
부러진 아일랜드 식탁 조절대도 뚝딱 교체해 주셨다.
공구치인 남편은 항상 땀만 뻘뻘 흘리다가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끝난 일들이 태반이었는데
이렇게 뚝딱 해결해 주시니 팀장님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저게 남자지.'
'남편도 소파랑 TV 정리할 때 같이 정리하고 왔어야 했는데......'
큰 짐을 떠안고 이사를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애를 할 때에는 무슨 콩깍지가 씌어서 남편이 멋져 보였던 걸까.
아들이 물었다. "엄마. 아빠 싫어하지?"
"응. 아빠 싫어. 정리도 못하고 공구도 못 다루고 육아도 못하고 사업한다고 빚만 지고 엄마가 지쳐."
"아빠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알았어. 노력해 볼게. 미안해."
영리하고 야무진 아들이 내 감정 상태를 벌써 읽고 내게 질문하며 삐걱대는 우리 관계를 정리해주려 했다.
아이 앞에서 철없이 남편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버렸다.
나는 정리를 잘하는 편이라 관계도 정리를 잘한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관계가 바로 남편과의 관계이다.
그동안 정말 우리 관계도 얼마나 굴곡이 많았던가.
얼마나 서로 물고 뜯고 할퀴며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냈었던가.
이사를 하며 소파며 TV며 불필요한 모든 건 다 정리했는데 제일 정리하고 싶었던 남편이라는 존재는 결국 정리하지 못하고 데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