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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Dec 21. 2023

조카손주며느리의 현명한 죽음

삶의 마지막 피날레를 어떻게 장식하고 싶으세요?

 지난여름, 나는 할머니와 할머니 따님과 함께 매실 꼭지를 다듬는 작업을 했다. 다 같이 옹기종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할머니 따님은 세 남매 중 둘째로 우리 친정 엄마와 동년배 나이셨다. 호칭이 어려워서 나는 할머니 따님을 그냥 이모님이라고 불렀다. 할머니에게는 4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첫째 큰 딸, 둘째 딸, 셋째 아들, 넷째 아들 이렇게 4남매를 이 시골집에서 낳아서 키우셨다고 했다. 첫째는 결혼하여 농사사업을 크게 일구고 둘째는 미혼으로 싱글라이프를 즐기고 사시는 듯했다. 셋째 아드님은 직업 군인으로 평탄하고 안정된 생활을 해오시다가 몇 년 전 은퇴를 하셨다고 했다. 시간이 자유로운 셋째 아드님은 할머니네 자주 들르시곤 했다. 아드님께서는 나무  가지를 쳐내거나 텃밭의 궂은일들을 도맡아서 마당 관리를 담당하시는 듯했다. 그런데 도통 넷째 아드님 이야기가 없으셨다. 나는 눈치 없이 넷째 아드님은 왜 안보이시냐고 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넷째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죽었어. 내가 팔자가 세서 막내아들을 먼저 보냈어. 그 뒤로 꽃을 가꾸기 시작한 거야." 일찍이 넷째 아들을 잃은 가슴 아픈 사연이 할머니에게 있었다.

 할머니의 둘째 딸인 이모님은 인천에 자가를 두고 직장 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연로하신 어머니 곁을 지키고 돌보러 고향집 이곳으로 오게 되셨다고 하였다. 할머니의 남편인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평생 농사를 짓고 사시다가 말년에 파킨슨 병을 앓게 되면서 건강이 무너졌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 병수발을 하랴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내셨다고 했다.

그래도 생전에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이 떠날 때를 스스로 알고 계셨는지 마지막 날에도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자신의 방에서 평소처럼 잠자리에 드셨다고 했다. 어느 날 밤 할머니는 큰 괴음소리에 놀라서 자다 깨어나 방으로 가보니 그것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외침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병수발부터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이모는 할머니께 연명치료 거부 신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엄마도 빨리 보건소 가서 연명치료 거부 신청 하고 와요. 의식이 있고 건강할 때 해놓아야 의미가 있지. 엄마도 올해 86세잖아. 현명한 죽음을 준비해야지."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연명치료 거부 신청이라는 제도가 생소하여 이모님께 다시 물어보았다."연명치료 거부 신청 제도란 게 뭐예요?"

이모님은 매실 꼭지를 떼어내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사람이 늙으면 희한한 병이 생기게 되잖아. 더 이상 살 수 있는 가망성이 없는데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항암제 등등을 무의미하게 투여하면서 숨만 간신히 붙들어놓고 못 죽도록 붙잡고 있는 경우들이 엄청 많거든.

돈은 돈대로 병원에 바쳐야 하고 자식들은 치료 거절도 못하고 당사자는 죽지도 못하고 피가 마르는 시간인거지. " "아......." 나는 매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 이야기를 툭 꺼낸 이모의 얼굴을 한번 보고 할머니 표정을 잘 살폈다. 할머니는 딸의 연명치료거부신청 제안에 대해서 무덤덤한 듯하면서도 약간은 떨떠름한 기분이 표정에 묻어 있었다.

할머니께서 입을 열었다."자식들 고생시키지 말고 현명하게 죽어야지." 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떨구고 매실 꼭지 따는 일에 집중했다. '현명한 죽음이라......' 죽음에도 어리석은 죽음과 현명한 죽음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정적을 깨며 이모님께 물었다. "그거 몇 살부터 신청 가능한 거예요?"

"19세 이상이면 다 가능할걸? 신분증 가지고 보건소 가면 다 신청해 준다던데?"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할머니! 연명치료 거부신청 언제 하러 가실 거예요? 저도 할머니 가실 때 같이 신청하려고요." 할머니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그래? 좋지! 나 보건소 갈 때 같이 가 그럼."그렇게 나는 할머니와 함께 현명한 죽음을 준비하게 되었다. 며칠 뒤, 나는 할머니를 내 차에 모시고 할머니와 함께 연명치료 거부 신청서를 작성하러 월곶면에 있는 보건소에 갔다. 보건소의 젊고 상냥한 언니는 친절하게 연명치료거부신청서에 대한 안내를 해주었다.

 보건소 담당자분은 내가 할머니의 며느리나 손녀딸이라도 되는 관계로 아셨는지 할머니께만 서류를 드리고 내게 서류를 건네주지 않았다. "언니! 저도 신청하러 왔는데요? 저도 서류 주시겠어요?"보건소 담당자는 살짝 당황한듯했다."아!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이 동네는 고령자분들이 많으셔서 보통 노인분들이 많이 오셔서요. 실례지만 할머니랑 관계가 어떻게 되실까요?" 나랑 할머니는 서로를 바라보며 뭐라고 설명할지 몰라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조카손주며느리예요."라고 한 마디로 우리의 관계의 설명을 일축해 버렸다. "아! 그러셨군요! 너무 보기 좋아요."담당자 언니는 할머니와 조카손주며느리가 함께 연명치료거부신청하러 오는 모습이 보기 좋았나 보다.

할머니도 나의 순발력 있는 대답이 마음에 썩 드셨는지 "우리 조카손주며느리예요. 하하하"라고 말씀하시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할머니께서 먼저 신청서를 쓰러 상담실에 들어가셨다. 나는 밖에서 유튜브를 보면서 순서를 기다렸다. 할머니께서 들어가신 지 한참 되셨는데도 나오지 않으셨다. 생각보다 상담 시간이 길어졌다. '엄청 오래 걸리네. 쓸 내용이 많나? 무슨 계약서 쓰는 것도 아니고. '  어찌 보면 죽음과 관련된 중요한 계약서나 마찬가지였다. 오래 걸리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한참 뒤 할머니께서 상담과 신청을 마치고 나오셨다.

내 순서가 되어 상담실로 들어갔다."상담이 꽤 길던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가요? 빨리 끝내주시면 안 되나요?" 상냥한 보건소 언니는 방긋 웃으며 "할머니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을 드려야 해서 조금 오래 걸리셨어요. 조카며느리님은 젊으시니까 자세한 내용은 스마트폰으로 큐알코드 찍어서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몇 가지 간단한 설명을 듣고 서류에 이것저것 체크를 하며 신속하게 서류 작성을 마쳤다. 연명치료 거부신청을 마친 할머니와 나는 현명한 죽음을 준비한 자에게서만 나오는 여유가 있었다. 보건소 담당자께서는 우리에게 선물로 드릴 게 있다며 캐비닛에서 무언가를 꺼내오셨다.

"이건 불소 가글이고요, 이건 모기퇴치 스프레이예요. 연명치료거부신청하신 분들께 드리는 증정품이에요."

할머니와 나는 보건소에서 덤으로 가글과 모기퇴치 스프레이도 받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이 사인한 연명치료거부 신청서도 왠지 보건소에서 위생적으로 잘 보관해 주실 것 같았다.

 현명한 죽음을 위한 첫 단계인 연명치료거부 신청을 끝냈으니 나는 미리 그다음 단계들을 차근차근 준비해 놓기로 했다. 우리가 출산 준비할 때처럼 그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죽음의 순간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지라도 마음은 매우 편안할 것 같았다. 그간 고된 일을 해왔던 육신의 껍데기를 잘 벗고 열반에 들거나 나의 영혼과 정신이 승화되는 관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는 쾍!하고 미련 없이 죽기로 했다. 오늘이 내게 주어진 전부라는 마음으로 날마다 즐겁고 생명력 넘치게 살겠다는 표현이었다.

 미래의 나의 장례식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았다. 기성의 장례식장 분위기는 너무 어두컴컴하고 무겁고 칙칙했다. 나는 나의 장례식장은 산뜻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구현하기로 했다.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한 사람들에게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충분히 애도하고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들이 단지 부조금을 고 바쁘게 떠나는 형식적인 장례식장이 아니라 생의 신비를 음미할 수 있고 현명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참된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래의 나의 장례식장을 그려보기로 했다.

장례식이라는 삶의 마지막 피날레에서 귀한 시간을 내어 나를 찾아준 사람들에게 영감과 감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안녕! 즐거웠어요! 우리 또 봐요! 하고 밝게 웃으며 런웨이를 퇴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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