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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Dec 22. 2023

30대에 신선이 된 아줌마

요즘 신선들은 어떻게 노는가

  봄의 기운을 가득 품고 초록빛 쑥들이 바위틈으로 쑥쑥 올라오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 번은 서대문구에 사는 혈액암 환우가 함께 산을 타기 위해서 문수산에 왔다.

서로 초면이라 나는 혈액암 환우분의 나이를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환우는 나의 이모뻘 정도는 되어 보였다. 혈액암 환우는 활짝 웃을 때 만개된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분홍빛 잇몸과 하얀 치아가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나이와 세대 차이를 떠나서 같은 '암'이라는 병을 지닌 것만으로도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암카페에서 소국이라는 예쁜 닉네임을 쓰고 있었다. 소국은 향기도 좋고 생명력이 뛰어나서 화병에 꽂아두면 일주일은 거뜬히 싱싱한 상태로 감상할 수 있는 꽃이었다. 나는 종종 소국을 한 단씩 사서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국을 펼쳐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줄기와 잎을 다듬곤 했다. 소국은 작고 귀여운 화형도 예쁘고 향기도 좋은데 가성비까지 좋은 꽃이라서 나는 소국을 참 좋아했다. 유리화병에 잘 정돈된 소국  한 단을 꽂아놓으면 하루 종일 향긋하고 기분이 좋았다. 잘 말려서 국화차로 우려내 마시면 향기는 정말 그윽하여 차분함과 마음의 안정을 안겨주는 꽃이었다.

 소국님에게는 닉네임처럼 그런 국화꽃 같은 면이 있었다.

소국님은 환하게 웃으며 어색함이나 낯가림 없이 시골집에 들어오셨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쌍화차 한통을 꺼냈다."이거 좋은 약재들 넣고 끓인 쌍화차예요. 잘 챙겨 먹어요. 이건 절편인데 맛있어요. 간식으로 먹기 좋아요."나는 뜻밖의 귀한 쌍화차와 절편 선물을 받게 되어 호랑이 기운 같은 힘이 솟아났다. 우리는 배낭에 물, 간식, 도시락을 챙겨서 산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나는 맨발에 낡아빠진 크록스를 신었다.

소국님께 나의 분홍색 꽃무늬 슬리퍼를 빌려드렸다. 누가 보더라도 발끝에서 삐거덕 거리는 복장이었다.

어차피 산에서 야생 동물들처럼 맨발로 걸어 다닐 거라서 운동화보다는 크록스나 슬리퍼가 벗고 신기가 편했다. 우리는 그렇게 털래털래 산을 올랐다. 입산하면 신발을 벗어 가방에 메거나 집어넣고 맨발로 산과 교감하며 걸었다.

 사람과 사람도 스킨십을 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피부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전해지듯이 산의 마음과 사랑이 나의 발바닥을 통해서 전해졌다. 나는 발바닥을 통해서 산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내가 산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는지 말이다. 그럼 언제나 산은 그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피부로 나의 발바닥을 쓰다듬으며  온몸으로 날 응원해 주며 힘을 실어 보냈다. 난 가끔씩 그 투박함으로 인해 발에 상처가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투박함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산은 웅크리고 엉엉 울고 있던 내게 호랑이처럼 바라보고 걷고 포효하며 살라고 했다. 산은 나를 그렇게 충만한 삶으로 이끌어주었다.

 우리는 산의 투박한 진심을 느끼며 한 고개를 거뜬히 올라왔다. 탁 트인 전망대에서 소국님은 명상을 했고 나는 단전 치기를 했다. 기마 자세로 서서 손바닥으로 배꼽 아래를 세차게 때려주는 것이었는데 나의 기합소리가 소국님의 명상을 방해한 것 같았다. 지금 와서 그때 그 장면을 떠올려보니 재미있는 시트콤을 시청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다시 문수산성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소국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문수산이 돌이 많고 거칠어서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소국님은 슬리퍼를 신었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나와 함께 중봉쉼터까지 올라왔다. 우리는 맨발로 문수산의 진심과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았다.

 중봉쉼터에서 문수산성으로 올라가는 데크계단 옆에는 통행금지라고 써져 있는 길이 있었다. 철조망도 쳐져있고 고도와 경사가 꽤 높았다. 나는 소국님에게 짜릿한 스릴을 전해드리고 싶었다. "소국님! 문수산성으로 가는 길이 여기서부터 세 개로 나뉘는데요, 오늘은 특별하게 암벽을 좀 타보실까요?" "좋아요! 가보자고요!"나는 소국님을 모시고 통행금지를 지나 철조망을 건넜다. 소국님도 슬리퍼를 다시 꺼내신고 철조망을 조심스럽게 건넜다. "모험을 좋아하는구먼!"소국님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분홍색 꽃무늬 슬리퍼를 신고 암벽을 잘 타고 올라오셨다. 생각보다 맨발로 암벽을 밟으면 발바닥이 착 달라붙어서 잘 미끄러지지 않아서 오히려 안전했다. 그 경사진 암벽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는 문수산성이 저만큼 보이는 곳까지 올라와서 앉았다가 가기로 했다.

 나는 배낭에서 따뜻한 차를 꺼내어 마셨다. 어쩌다 생업처럼 하게 된 신선놀음이 의외로 적성에 잘 맞고 별일 없는 일상에 운치가 생겼다. 그 높은 암벽들 사이사이에 초록빛 쑥들이 쑥쑥 올라와 있었다. 소국님과 나는 가방에서 여분의 봉지를 하나씩 꺼내어 쑥을 캤다. 쑥향기가 너무 향긋했다.

쑥을 캐던 소국님이 쑥덤불에서 뭔가 발견하였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불렀다."두꺼비다! 두꺼비가 여기 있네?" 주먹만 한 큰 두꺼비 한 마리가 황톳빛으로 보호색을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어디요? 어디요? 안 보이는데요?"나는 한참을 헤매다가 두꺼비를 발견하였다. "우와! 두꺼비네!" 쑥을 캐다가 우연히 만난 두꺼비가 그렇게도 반갑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두꺼비를 보면 행운이 온다며 네 잎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경쾌하게 문수산성으로 올라갔다. 산성 아래쪽은 절벽을 타고 산딸기  넝쿨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산딸기다! 조금 있으면 여기 산딸기가 수두룩 열리겠어요. 산딸기 따먹으러 와야겠네요!"

우리는 빨간 산딸기가 얼마나 신선하고 달콤하게 톡톡 터질지 상상하며 문수산성에 올라왔다.

정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사과를 꺼내서 한입 베어 물었다.

사각사각 달콤한 사과를 씹어 먹으며 시원한 바람이 불면 나는 천상 세계의 인간이 된 것 같은 황홀함을 느꼈다. 나는 산성의 성곽에 기대어 경치를 바라보며 사과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으악!"나는 너무 놀래서 사과를 떨어트리고 말았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저쪽 편에서 사과를 먹으며 경치를 바라보고 있던 소국님이 놀라서 내게 맨발로 뛰어왔다."벌레가 사과에 날아와서 깜짝 놀라 사과를 떨어트렸어요."소국님은 씩 웃으며"에이, 뭐야~깜짝 놀랐잖아."

 나는 매일 혼자 맨발로 씩씩하게 산을 타면서도 이렇게 작은 벌레가 이마나 손등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놀라곤 했다. 우리는 산성에서 사과를 다 씹어먹고 2번 장대로 향했다. 2번 장대로 올라 벤치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만들어온 현미밥, 강황카레, 순무김치와 양배추 샐러드를 꺼냈다. 강황가루를 왕창 넣고 만든 거라 강황 특유의 향이 나는 카레였다. 달콤한 시판 카레맛은 아니었지만 소국님은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장대 2에서는 저 멀리 임진강도 보였다. 장대에서 탁 트인 멋진 전망을 보며 먹는 점심 도시락은 배보다 눈이 먼저 불렀다. 든든하게 배도 채우고 디저트로 아몬드쿠키도 먹고  문수사를 들러서 하산하기로 했다.

 문수사에 들러서 약수로 목을 축였다. 문수사 계단을 막 내려가려는데 소국님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웃다가 가자는 제안을 했다."우리 여기서 웃다가 갈래요?" 우리는 도량 앞에서 오동나무를 잡고 서로를 보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한참을 웃어댔다. 그 고요한 사찰에 간간이 들리는 풍경 소리를 제치고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향해 앞서나갔다. 소국님과 함께한 즐거운 신선놀음을 마치고 능선을 타고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시골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불한증막이 있었다. 소국님은 다음번에는 불한증막을 하러 오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시골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가고 소국님은 서대문구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우리는 종종 문수산에서 만나 함께 산을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국님과는 정말 즐겁고 재미있는 추억들이 많이 생겼다. 나는 소국님은 장수할 거라고 보았다.

우리는 암환자라기보다는 신선에 가까웠다. 신선이 된다는 것은 정말 신선한 일이었다. 시들시들 말라버린 삶 속에 싱싱하게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 신선놀음에 있었다.

나는 젊은 나이에 신선이 된 나의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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