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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Dec 18. 2023

술자리에서 말 많은 사람


  지난달, 학교에서 운영하는 일본어 중급 교실이 한 달에 걸쳐 끝났다. 한 달 동안 우리는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답게(?)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수업 때 누군가 불쑥 오늘 술자리를 가지자고 제안했고, 수업이 끝나고 바로 술자리를 가졌다. 더듬거리며 일본어를 연습하는 모습만 보다가 한국말로 재잘거리는 모습들을 보니 생경했다. 우리는 그 후 몇 번의 술자리를 더 가졌고, 어제가 그중 하나였다.

  만나기로 한 학교 근처 맥줏집에 갔다. 가는 길에 카톡을 확인해 보니, 다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미안하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빨리빨리 좀 다니지’ 속으로 중얼댔지만, 나 역시 지각이었다. 가게에 거의 도착할 즈음 늦을 것 같다고 말했던 누나와 우연히 만나, 가게로 함께 들어갔다. 도착해 보니 나와 누나를 제외하고 두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총인원이 여섯 명이니 두 명이 아직 오지 않았다.

  모임의 최고 연장자 형과 나이가 제일 적은 여동생이 함께 있었는데 어색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어제 늦게까지 과음이라도 했는지, 형은 누가 봐도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푸석푸석한 구릿빛 피부와 말하는 중간중간 힘없이 지어 보이는 자조적인 웃음은 그를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형은 잿빛 색깔의 무기력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에 비해, 막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죽히죽 생글거리며, 탱탱하고 광채 나는 피부를 자랑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필요하면 자기 얘기를 거침없이 풀어냈다. 그녀는 젊지만, 어린아이의 원초적 에너지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기력 소모를 다 한 30대 중반의 남성과 넘실거리는 생명력의 20대 초반의 여성.

  그 둘은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는데,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맥주와 피자를 시켰고 조용히 수다를 떨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두 명을 기다렸다. 그 둘은 나와 동갑내기인데, 이제까지의 만남을 떠올려보면 여자애보단 남자애가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툭툭 내뱉는 말투로 사람들을 웃기게 하는 타입이었다. 반면, 여자는 별 재미도 없는 시답잖은 말로 다른 사람의 발언권만 독식하는, 눈치 없는 투머치토커였다. 열정 과다, 능력 부족의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남자가 먼저 왔고, 여자는 한 시간쯤이나 뒤에야 온다고 했다. 한 시간이나 뒤에 온다니.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의 안부나 관심사에 대해 얘기했고, 적적했던 맥줏집은 금세 화목한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결국 여자는 도착했다. 운명을 직감한 우리는 주섬주섬 무대에서 내려왔고, 여자는 지나치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혼자 텅 빈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그렇게 다시, 그녀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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