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는 조별과제가 많다. 이상한 일이다. 다섯 과목 중 무려 두 과목이나 조별과제가 있다. 한 과목은 한 명의 조원과 특정 주제에 대해 ppt를 만들어 발표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명의 조원과 데이터 분석, 발표, 보고서까지 작성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다니. 자랑스러운 우리 학과, 경제학과는 조별과제, 팀별과제 따위는 없는 학과다. 조별과제는 차치하고, 과제 자체가 없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다른 학과에 비해, 학과 내 사람들 간 교류가 적고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이 많다. Mbti i 성향의 사람만 모인 학과라는 소리도 나돈다.
이런 유서 깊은 전통을 깨고 두 명의 교수는 과감하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자존심 센 교수 하나는 자신의 열정을 있는 척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학생들에게 엉뚱하게 조별과제를 요구했다. 마음씨 고운 초임 교수 한 분은 학생들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비교적 실용적인 조별과제를 내주었다. 여기서는 능력과 의지는 없지만, 학생들에게 특별한 교수로 기억되고 싶어 하는, 성질 더러운 첫 번째 교수에 대해서만 쓰겠다.
그가 요구하는 발표는 사실 부담이 크지는 않았다. 모든 게 비즈니스처럼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각 팀들은 팀원들과 상의해 ppt 자료를 만든다. 학생들 숫자가 많기 때문에 발표는 여러 날에 걸쳐 나눠서 하고, 발표 점수는 학생들이 매긴다. 팀원들이 강단에 서 거대한 빔 프로젝트로 PPT를 띄워 발표를 하면, 듣는 학생들은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발표 첫날, 첫 번째 학생의 발표 도중,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앞자리에 앉아 있던 교수는 문득 강의실 맨 뒷자리로 자리를 옮겨 발표를 이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방에 앉은 학생에게 ‘잘 안 들리지?’라고 물었다. 그 학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뒷자리에 앉은 나 역시 발표자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강의실 전체를 울리기에는 강의실이 너무 컸다. 그래서 교수가 곧장 학생의 발표를 중단시키고, 마이크라도 갖다 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의지도 없었던 교수는 심드렁하게 끝까지 발표를 들었고, 발표가 끝나자 별다른 말 없이 곧바로 다음 학생에게 발표를 넘겼다. 이렇게 그날 발표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을 하는 시간에는 누구도 발표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교수조차 질문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발표에 대해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 평가 기준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목소리 크고, 또박또박 말을 잘하는 것 같으면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이쁘고 잘생기고 인상 좋으면 그런대로 또 유리할 것이다. PPT 자료의 충실함이나 내용적인 부분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 팀 발표는 둘째 날이었다. 역시 마이크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단정한 차림새로 나가 기계적으로 또박또박 큰 소리로 대본을 읽었다. 발표는 건조하게 끝났고,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엘리베이터에서 서슬라브족을 연상시키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말을 건넸다. 발표 잘 들었고, 우리 팀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고 말했다. 아무렴, 우리 팀이 다른 팀에 비해 외형적으로 더 나았지. 아닌가? 딕션, 발성이 더 나았던 건가? 아니면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발표를 한 탓에 그나마 기억에 남았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