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 요즘은 출석을 부르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 과거처럼 학생 이름을 부르며 체크하는 방식, 교수가 무작위 숫자 셋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앱에서 숫자를 입력함으로써 출석을 인증하는 방식이다. 호명하는 것으로 출석하는 경우, 이름이 불리면 대답한다. 그리고 다른 학생이 호명되는 동안에 깜빡 두고 온 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교실을 빠져나온다. 앱으로 출석하는 경우, 교수가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적으면 학생들이 앱에 들어가 해당 숫자를 입력해 출석한다. 교수가 숫자를 적는 동안 나는 이미 강의실 뒷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숫자를 분간할 수 있는 그 절묘한 타이밍에(여전히 교수는 숫자를 쓰고 있다),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 숫자 셋을 머릿속에 똑똑히 세긴 다음, 뒷문을 열고 강의실을 유유히 빠져나온다.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앱으로 들어가 출석체크를 한다. 이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여닫아야 한다. 그것은 출튀(출석하고 튀기)의 기본이자 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강의실을 빠져나오면 강의실 건물 1층 카페로 향한다. 강의실에 오기 전, 출튀를 위해 가방을 거기 두고 왔기 때문이다. 가방을 챙기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매번 하는 일이지만, 언제나 해방감을 느낀다.
출석 한 번 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40분가량 걸리는 학교까지 가는 것은 얼핏 보기에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학교 수업에서 내가 하는 것이라곤 이름 부르면 ‘네’라고 대답하는 것과 교수가 적은 숫자 셋을 받아 적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한 친구는 학교까지 간 게 아까워서라도 수업을 들을 생각은 해보지 않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출석함으로써 하루를 조금 더 성실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천착했다. 대학교라는 시스템은 제한된 강제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거대한 알람이 되어, 나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곤히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고, 외출을 위한 단장을 닦달하고, 몸을 움직여 지하철을 타게 한다. 덕분에 월요일 이른 아침 수업이 있으면, 그날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는 독서나 영어 듣기를 하기 때문에 가는 시간도 아깝지가 않다. 만약 아침 수업이 없었다면 늦잠을 자거나, 적어도 도서관에서의 효율만큼 생산성 있게 시간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난 내심 이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얻고(F를 면하고), 무용한 시간을 줄이고,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으니 말이다. 때로 수업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갖는다.
비대면 강의의 경우엔 일이 간단히 진행된다. 다행히 출튀와 같은 퍼포먼스까지 보일 필요는 없다. 강의 녹화 프로그램으로 강의를 녹화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를 호명하는 건 아닌가 한 번씩 불안해 종종 이어폰을 꽂고 수업을 들어보기도 한다.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교수를 보고 안도하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엔 주로 책을 읽는다. 학교 축제 기간이면, 축제 분위기를 즐기러 캠퍼스 거리를 쏘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은 학교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리 활동이나 학생회와 같은 활동을 하지 않았고, 같은 학과에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강의실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출석하고 도망가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비칠 나의 이미지라는 것도 있고, 또 만약 그 사람이 나에게 따지고, 교수에게 따지고 든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다. 생판 모르는 남들이 가득한 강의실은 출튀를 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이다. 그들은 나를 모르고, 나도 그들을 모른다. 또 교수들은 그동안 내 행동을 지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관심이 없어서인지 진짜 몰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수가 한 번 지적이라도 했다면, 그 교수에 한해서 출튀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히도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고, 사 년 동안 별 탈 없이 출튀를 할 수 있었다. 내 대학 생활 통틀어 아마 전체 대면 수업 중 칠팔십 퍼센트는 출튀를 했던 것 같다. 마지막 한 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도 예전만큼 왕성하진 않지만, 여전히 출튀를 하고 있다. 예전만큼의 활동력을 뽐내지 못하는 건, 최근 들어 수업의 또 다른 효용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현재 자격증 면접시험을 두 달 앞두고 있는데, 마땅히 공부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수업 시간에 끝까지 자리에 앉아 면접 공부를 해봤는데, 집중이 잘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절한 소음과 긴장이 집중력을 높인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수업은 면접 준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렇게 살았을 때의 부작용도 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것은 시험 범위를 잘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시험을 언제 치르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시험 범위나 일정을 공지해주는 교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수도 드물지 않게 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없어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양심상 교수한테도 물어볼 수도 없다. 그럴 때 나는 교수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한다. 교수의 입장이 되어 내가 교수라면 어디까지 시험 범위를 정할까, 고민하고 자의적으로 시험 범위를 정한다. 그게 맞는지는 시험을 쳐봐야 알 수 있다.
수업도 안 듣는 주제에 성적은 받아보겠다고 공부하는 꼴이 웃기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여기서 구별해야 될 것은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이 해당 과목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왜 수업을 듣지 않는가. 여기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