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10. 초록바람

by 금봉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도 모든 것이 푸르렀다.

아직 체 자라지 않은 연두색 이파리가 햇살과 바람이 만든 속삭임에 한들한들 나풀거렸다.

자리에 서서 오랜 시간이 지나 돌이 된다 해도 좋을 만큼의 반짝임이다.


사실 암울의 집, 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저 보고 싶었다. 아저씨와 카미의 밝은 초록 바람과 냄새가 드나드는 그곳을.


내게 묶인 젖은 바다의 파란 실타래를 풀어내기 위해 걷고 또 걷고 또 뛰고 또 뛰어 낸 후 이곳에 발을 디뎠다. 혹시나 남았을 실타래가 발에 묶여 있을까, 머뭇거리다 다시 걷고 다시 뛰어 닳아 빠진 발을 다시 디뎠다.


예전처럼 벼 구멍을 찾아보았다.

숙인 벼를 닮은 그가 암울의 집을 드나들던 그 벼 구멍, 아직 형체를 간직하고 있는 구멍에 고개를 쓱 내밀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곳을 보았다.

푸른 잔디가 반짝였고 카미일까, 의문스러운 고양이가 볕을 쬐고 있었다.

과연 이곳에 평화의 빛이 길을 들였을까. 난 웅크린 체 벼 구멍에 앉아 암울의 집을 살폈다.

카미가 미야오, 라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또 한 번 미야오.


아, 그때의 카미가 맞다.

엄마를 잃은 이곳에 자궁을 채워 다시 나타났던 그 카미가 맞다.

카미의 카미가 꼬리를 추켜올리며 내게 이마를 갖다 댔다.


“안녕, 카미”


현관문이 열렸다. 아저씨다.


“문으로 와야죠”


웃으며 내가 말했다.


“거지꼴이라서요”


아저씨는 내 모습을 찬찬히 살피더니 대답했다.


“그렇군요, 거지꼴”


날짜를 세기 시작했지만 세기를 포기한 그 언제부턴가 그것을 잊기 시작한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언제 세수를 했고 언제 밥을 먹었고 언제 물을 마셨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내 딱딱해진 머리카락에 카미가 킁킁거리더니 잔소리라도 하듯 멀찌감치 떨어져 나갔다.


아저씨가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손을 뻗었다.

진한 초록의 풀 냄새가 났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순간 아저씨 곁에 한쪽 눈을 추켜올리고 나를 바라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말문이 막혔다.

내 몸이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린 카미가 여자아이 앞에서 나를 보며 등을 세우고 발톱을 드러냈다.

물러난 발을 다시 들이밀며 난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눈, 코, 입, 손가락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난 나와 같은 그 짝눈을 알아보았다.


“아, 넌...”


별아다. 김별아.

별아는 보란 듯이 아저씨의 손을 꼭 잡으며 카미를 안아 올렸다.

아저씨가 말했다.


“들어와요, 어서”


오랜만에 뜨거운 물을 온몸에 부딪었다.

닦고 또 닦아 내지만 검은 물을 쉽게 색을 잃지 않았다.

아저씨가 솜씨를 부리고 있는 냄새가 났다.


이곳에서 별아를 마주한 후, 난 이상하리만큼 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의문도 생기지 않았다.

마치 뭔가 약속되었던 것처럼 이 자리가 그 아이의 자리는 아니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올 곳...'


아진은 별아의 아비를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모르고 지나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지나친 가벼움에 치를 떤다고 말을 덧붙였다.


캄캄한 밤, 반은 떨어져 나간 대문 덕에 검은 숯으로 칠갑을 한 짐승.

그 짐승은 아진이 그놈이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달려들어 범했다.

한번 스친 검은 숯 칠에서 비치는 번뜩이는 눈, 그 짐승의 눈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몇 되지 않은 동네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했다. 하지만 경찰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진의 배가 점점 부르기 시작했고, 엄마는 그때부터 정신을 놓기 시작했다.


별아가 세상에 나온 그때, 아진은 꼭 기억하려 했던 그 번뜩이는 그 눈을 별아에게서 보았다.

번뜩이는 눈을 가진 그 짐승에 대한 분노는 고스란히 별아에게 닿았다.

상처가 아물 무렵 그 분노는 또 시작됐고 긴 세월 동안 반복되어 갔다.


내가 사막을 떠돌고 있을 때 별아는 빠르게 성장해 나갔고, 번뜩이는 짐승의 눈을 가진 그놈은 다시 아진의 피의 살냄새를 찾았다. 하지만 그 짐승처럼 그 짐승의 냄새를 아진도 기억했다.

그날 밤도 아진은 소주를 마셨다.

불빛은 한 치 앞을 캄캄하게 드리웠지만 그놈의 그림자를 보자마자 역한 냄새에 아진은 치를 떨었다.

아진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을 들어 빠르게 그놈에게 돌진했다.

잠든 별아가 어느새 달라진 공기에 놀라 아진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엄마, 엄마아”


아진은 뒤돌아 별아를 보고 소리쳤다.


“도망가 어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진과 놈은 동시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놈이 별아 쪽을 계속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진의 눈이 돌기 시작했고 불붙은 장작으로 그놈의 얼굴에 갖다 댔다.

아진이 다시 소리쳤다.


“그곳으로 가 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마”


놈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내 새끼? 허허"


놈의 질퍽하고 가래 낀 목소리에 아진은 다시 돌았다.

그리고 굴 껍데기용 칼을 꺼내 들어 목을 찔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척척, 하는 소리가 퍼진다.

아진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때의 나처럼 별아는 목소리를 잃었다.

아저씨가 처음 별아를 본 순간 짝눈의 쓰임새가 이렇게 클 줄을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뻤다고 말했다.

자궁이 텅, 하고 사라진 짝눈에게 빛이 있었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보자마자 알았어요

여욱씨 빛인 것을”


난 아저씨가 부린 솜씨의 음식들을 오랜만에 채워 넣었다.

난 말을 하지 않았다.

별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목소리와 아저씨의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별아가 일어나 주전자에 있는 것을 따라 내게 건넸다.

보리차다.

아진이 떠올라 침을 꿀꺽, 하고 통증을 동반했다.

난 식은 보리차를 들고 별아에게 눈으로 살며시 말했다.


“고마워”


우리 셋은 집안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별아가 잠이 들면 아저씨와 난 그때부터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내가 속삭이며 말을 건네는 것을 좋아했다.

난 아저씨에게 잠들기 전 꼭 잊지 않고 말했다.

매일매일.


“고마워요, 성기 아저씨”






작고 은빛이 도는 항아리를 별아가 끌어안았다.

내가 물었다.

“무겁지 않아?”

별아가 도리질했다.

그리고 되찾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아진처럼.


“그렇다고 이모가 들 것 아니면서 그래요”


나는 별아처럼 도리질했다.

우린 같은 짝눈을 하고 배시시 웃었다.

흐린 날의 사막은 파란 하늘이 주황빛 모래를 감싸는 것보다 더 멋져 보였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모래의 감촉이 좋다.

우린 가장 높은 사구에 앉았다.

모래바람이 조금의 수분도 용납하지 않았다.

난 별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아가 항아리를 열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뽀얀 가루의 아진이 바람을 타도록 도와주었다.

아진이 끝없이 끝없이 하늘 위로 날고 또 날았다.

텅 빈 항아리를 사구 밑으로 던져 넣었다.

빠르게 항아리는 형체를 감추었다.


별아가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리고 말했다.


“엄마도 할머니의 자궁 안이 더 편했을까...”


내가 대답했다.


“응”


별아가 나의 아랫배에 귀를 갖다 댔다.


“정말 없어요?”

“응”


“돌아가고 싶은데...

안 되겠네..."


난 별아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인 자궁 속으로 보낼 것처럼.